영국의 학자 파킨슨은 일찍이 관료제의 병리를 꼬집었다. ‘파킨슨의 법칙’ 외에도 그가 제시한 공식 중 재미난 게 있다. 관청에 들어가면 누가 ‘가장 높은 어른’인지 금방 알 수 있는 방법이다. 즉, 지나가야 할 방 문의 수, 거느리고 있는 부하의 수, 전화기의 수, 그리고 바닥에 깔린 카펫의 두께를 보라는 얘기다. 어느 비평가는 여기에다 두 가지를 덧붙였다. ‘무리와 떨어져 앉아 있는 사람, 무리로 하여금 경청의 자세를 지키게 하는 사람’이 그것이다.
물론 수십 년 전에 나온 파킨슨의 분석이 오늘날에도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 그 메시지와 울림은 유효하다. 관료적 권위주의가 똬리를 틀어온 한국에서는 더 그렇다. 한상진 교수가 1980년대 그의 논문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나라 사회는 성장의 능률·효율화란 명분 아래 관료 중심체제가 굳어져 왔으니 말이다.
1995년 7월 민선 자치단체장 시대가 열린 뒤로는 관청의 문턱이 상당히 낮아졌다. 관료에 의한 일방주의 대신 민의에 의한 소통이 대세를 이뤄서다. 전국 곳곳에서 구청장실을 개방하고 나선 게 상징적이다. 근래에도 그런 흐름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 이후 구청장 집무실을 청사 1층이나 민원실이 있는 층으로 옮기는 일이 부산 경남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나타났다. 게다가 각급 행정·공공기관 조직의 이름에 ‘소통’이란 말이 붙은 것도 이제는 아주 흔한 현상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주요 대선 공약인 ‘대통령 집무실 광화문 이전’이 사실상 무산된 걸 두고 논란이 뜨겁다.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이후 장기 사업으로 검토하겠다며 ‘보류’라고 표현했지만, 결국 공약을 폐기한 것으로 읽힌다. 이 공약이 국민과의 소통 강화에 있다는 건 말할 나위가 없다. 2017년 당시 문 후보의 선거 공보물에는 이 같은 문구가 적혔다. ‘광화문 대통령-퇴근 후 시장에 들러 넥타이 풀고 국민들과 소주 한잔 나누는 소탈하고 친구같은 대통령, 문재인이 꿈 꿔온 대통령의 모습입니다’.
따지고 보면 대통령 집무실이 어디에 있느냐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핵심은 국민과의 진정한 소통이다. 한데, 문 대통령의 뜻과 상관없이 ‘청와대 측근 권력, 인(人)의 장막’ 등의 비판이 나오는 건 우려스럽다. 소통이 없고 막힌 관료적 권위주의는 권력 집중의 폐해를 낳기 마련이다. 비록 ‘광화문 집무실’ 공약은 지키지 못하더라도, 소통 의지를 새롭게 다지고 이어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납득할 수 있지 싶다.
구시영 논설위원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