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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수의 세설사설] 1919년 그리고 100년, ‘잡화엄식(雜華嚴飾)’을 꿈꾼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1-06 19:30:57
  •  |   본지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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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만세운동의 기운이 응결돼 그해 4월 13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도 다 아는 일입니다. 3·1운동 기념행사를 남북이 함께 치르는 데 따른 우리 내부의 이념 갈등이 있어서는 안 될 터입니다.

화엄은 ‘잡화엄식’의 준말이라지요. 크고 화려한 꽃들만이 아니라 들판에 지천으로 깔린 자잘한 잡화가 하나하나 모여 마침내 거대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뜻일 터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꽃처럼 아껴주면서 작은 차이를 잊고 힘을 합쳐 화엄의 꽃밭을 이루는 한 해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새해를 맞고 며칠이 지났지만 사람들의 표정에 묵은해를 보내고 새날을 맞은 감회가 아직은 남아 있는 듯합니다. 지난주에 비해서 조금 풀렸다고는 하지만 날씨는 여전히 차군요. 올해는 기해년(己亥年), 속칭 ‘황금돼지의 해’라지요. 황금돼지가 연상시키는 대로 우리네 살림살이가 올해는 좀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경제정책을 제대로 꾸려보겠다고, 그래서 서민들이 살 만한 한 해를 만들어 보겠다고 다짐하는 신년사를 발표하기도 했으니까요.

날씨가 추우니 문득 시 한 편이 떠오릅니다. 독립지사이자 시인인 이육사 선생의 ‘절정(絶頂)’이란 작품이지요.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어떤가요. 잘 알려진 작품이긴 해도 요즘 같은 절기에 어울리는 시가 아닌가요. ‘강철로 된 무지개’처럼 겨울은 엄혹하고 강인한 계절이 아닐 수 없겠지요. 무지개는 화사함, 꿈, 이상향의 상징이지요. 그런데 그 무지개가 날카로운 금속으로 만들어졌다니. 육사에게는 독립을 쟁취한 조국은 무지개 같은 이상향이지만, 그것은 강철처럼 단단하고 엄혹한 탄압을 이겨내야만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테지요. 그러기에 한 발 물러설 데 없는 칼날 위일망정 무릎 꿇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육사 선생의 시 한 편을 오늘의 화두로 삼은 뜻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올해가 우리 근현대사에서 기념해야 할 해이기 때문입니다. 다들 아시는 대로 3·1 만세운동이 터졌고,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으로부터 꼬박 100년이 지났지 않습니까. 유구한 민족사에서 한 세기란 그리 길지 않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길어봤댔자 80년을 살다가는 인생사와 비기면 긴 시간일 터입니다. 그러니 어찌 100년 전 그날을, 나아가 고난과 좌절, 그리고 성취와 영광으로 점철된 지난 100년의 궤적을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 글을 쓰기 전에 100년 전 기미년의 연표를 찾아봤는데요, 그해 1월 21일 고종 황제께서 승하했군요. 고종 황제는 당시 일제에 의해 독살됐다는 의심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의 승하는 망국의 백성들에게 비탄과 분노를 불러 일으켰고 그래서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우리가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웠던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 조선(我朝鮮)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되는 최남선의 그 문장 말입니다. 하고 보면, 수업시간에 눈을 지그시 감고 그 긴 문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없이 줄줄 외시던 40여 년 전 선생님의 얼굴도 스쳐갑니다.

다들 아시는 대로 3·1만세운동은 우리 근대사에서 잊힐 수 없는 인물을 많이 낳았지요.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에겐 누나일 수밖에 없는 유관순 열사가 대표적이지 않습니까. 마른 들판에 불길 일어나듯 방방곡곡으로 퍼진 만세운동은 부산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는데요, 그해 3월 11일 부산진의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시작한 만세의 함성이 부산포 거리를 휩쓸었다지요. 그 함성은 그 이듬해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탄투척 의거로 이어졌고요.

만세운동의 기운이 응결돼 그해 4월 13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도 다 아는 일입니다. 그 사건은 김구 선생을 비롯한 숱한 독립지사의 풍찬노숙(風餐露宿)이 이어졌지요. 해방까지 26년의 세월 동안 숱한 선열이 이름 모를 광야에서 이슬처럼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처음의 의기를 잊고 일제에 몸을 굽힌 이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독립선언문을 초한 육당이 그랬던 것처럼. 투쟁의 역사이건, 오욕의 역사이건 한 세기가 지난 지금은 차분하게 지난 역사를 객관적으로 살필 필요는 있겠습니다.

어쨌든 100년 전 그해는 그런 해였습니다. 그러니 새해를 맞은 우리의 마음가짐도 여느 해보다는 조금은 더 경건해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정부 차원에서도 여러 가지 기념행사가 열릴 테고요, 남북 간에도 100년 전의 오늘을 고리 삼아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겠지요. 3월 1일부터 임시정부가 수립된 4월 11일까지 전국 곳곳을 독립의 횃불을 릴레이로 봉송할 것이라는군요. ‘3·1운동 100주년 남북 공동기념행사’가 마련되는 데 이어 남북이 함께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독립운동 행적지 순례와 항일운동을 주제로 한 국제 학술포럼도 연다는군요. 남북이 함께 순국선열의 희생을 기린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북핵 협상이나 상호 교류협력에도 도움이 될 수 있겠지요.

걱정되는 바도 없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3·1운동 기념행사를 남북이 함께 치르는데 따른 우리 내부의 이념 갈등이 있어서는 안 될 터입니다. 대승적인 관점에서 민족사적 기억을 공유하려는 마음가짐을 잃어선 안 되겠지요. 말 난 김에 한마디 보태자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1919년인지, 1948년인지를 두고 벌여온 소모적인 논쟁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글쎄,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지만 상해 임시정부의 성립 자체가 일제의 국권강탈 행위 자체를 결코 인정하지 않겠다는 민족적 의지의 산물이 아니겠습니까. 영토니, 국민이니, 실효적 지배 따위 국제법 개념을 들먹여 임정을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겠다면 결과적으로 일제의 한반도 지배를 합법화하는 논리적 모순을 우리 스스로 범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스쳐갑니다만. 해방이 투쟁의 산물이냐, 미국의 선물이냐 하는 논쟁도 부질없긴 마찬가지일 터입니다.

나라 안팎을 살피면 올해 역시 쉽지 않은 한 해가 될 듯합니다. 그래도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남북 화해의 시금석이 될 중요한 시기이니 정부와 국민 모두 힘을 합쳐야 하겠습니다. 트럼프-김정은 2차 회담이 고비가 될 텐데요, 자칫 삐끗하지 않도록 우리 정부가 정신 차려 훈수할 일입니다. 세계 경제가 어려운 와중에 문재인 정부는 경제 회복에도 사활을 걸어야 할 터입니다. 복지와 고용, 서민 생계 보장 등등 난제가 숱하지 않습니까. ‘사람 중심의 경제’라는 원칙은 지키되 실용적인 태도를 견지할 일입니다. 장기적 관점에서 산업 체질 개선이란 어려운 과제와도 씨름해야지요. 정부는 지난해의 일부 정책적 실수를 복기하면서 꼼꼼하게 경제를 챙겨야 하겠거니와 야당이나 일부 보수언론도 비판과 조언은 아끼지 않더라도 중상(?)에 가까운 헐뜯기는 삼가는 게 어떨까 합니다만.

올해가 ‘황금 돼지의 해’라니 지레 걱정 되는 대목도 있습니다. 다들 살림이 펴이긴 해야겠지만 우리가 지나치게 물신주의에 휘둘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명박 정권 때였던가, “부자 되세요!”하는 덕담(?)이 유행어가 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부자가 되는 것이 나쁠 리야 없겠지만 온갖 반칙을 저지르더라도 돈만 벌면 된다는 왜곡된 가치관으로 연결되지는 말아야겠지요. 올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 더 따뜻하고 영성적이며 공동선을 지향하는 곳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문득 ‘화엄(華嚴)’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온갖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뜻인데요, 불법의 광대무변함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면서 동시에 온갖 분별과 대립이 극복된 이상적인 세계를 표상하는 말이지 않습니까. 화엄은 ‘잡화엄식(雜華嚴飾)’의 준말이라지요. 크고 화려한 꽃들만이 아니라 들판에 지천으로 깔린 자잘한 잡화가 하나하나 모여 마침내 거대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뜻일 터입니다.

새해엔 온갖 ‘잡화’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꽃 세상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추운 겨울 새벽 거리를 청소하는 분들, 찬물에 늘 손을 넣어야 하는 식당 아주머니들, 차가운 대기를 호흡하며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달리는 택배 아저씨들…. 그뿐이겠습니까. 너와 나, 그리고 우리라는 삼라만상이 우주를 구성하는 한 떨기 야생화이지 않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꽃으로 태어난 사람인 걸요. 서로가 서로를 꽃처럼 아껴주면서 작은 차이를 잊고 힘을 합쳐 화엄의 꽃밭을 이루는 한 해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니, 육사의 소망대로 ‘매운 계절의 채찍’에서 벗어나 진실로 아름답고 화사한 무지개를 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소망을 안고 2019년 기해년을 시작해 봅니다. 올 한 해를 살아낼 제 자신과 모든 이웃에게 응원의 구호를 외쳐봅니다. 아자!

소설가·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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