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화요일 오후 북한산 중흥사에서 허수경 시인의 49재가 있었다. 날은 꽤 찼다. 북한산 골짜기로 들어갈수록 물은 유리처럼 맑았지만 대기는 한층 서늘했다. 북한산은 좀 더 일찍 겨울의 땅에 발을 들여놓은 듯했다. 잎사귀가 진 나목들의 빈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걸어 올라갔을 때 절의 풍경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대웅전에서는 스님들이 염불을 하고 있었다. 중흥사의 동명 스님은 여러 권의 시집을 펴낸 시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지난해 캐나다에서 별세한 박상륭 소설가의 재를 중흥사에서 지냈고, 앞으로는 진이정 시인과 허수경 시인의 기제사 겸 추모재를 매년 10월 3일에 지내려 한다고 했다. 동명 스님은 진이정, 허수경 시인과 ‘21세기 전망’ 동인 활동을 함께한 인연이 있었다.
허수경 시인은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을 해오다 지난달 3일 독일에서 별세했다. 나는 독일 현지에서 치러진 시인의 수목장 장례 사진을 지인으로부터 받고 한참을 넋 놓고 앉아 있었다.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와 두 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펴낸 후인 1992년 시인은 독일로 돌연 건너갔다. 뮌스터대학교에서 고대 근동고고학 공부를 했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두 대륙 너머 독일에 살면서 창작한 시를 꾸준히 발표했고 여러 권의 시집도 출간했다. 시인은 이방인으로서의 고독을 시 짓는 일로 견뎌냈을 것이다.
‘존재할 권리’라는 글에서 ‘이 나라의 말, 설렌다, 라는 마음을 표현하는 그 말 앞에서 내 마음은 요지부동, 꼼짝하지 않는다. 그 말은 나를 설레게 하지 않는다. 나는 내 말 속에서 설렌다’라고 썼다. 모국어를 활용해 자신의 말과 글에 직접 사용하는 그 순간에만 설레게 된다는 뜻이니, 이 문장들에는 모국어에 대한 향수가 절실하게 배어 있다고 하겠다.
49재에는 문인들뿐 아니라 많은 독자가 함께했다. 문학 세계를 소개했고, 문인들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문학평론가인 문학과지성사 이광호 대표는 “허수경 시인이 이국의 먼 곳에서 보내온 시들을 읽으며 익숙한 한국어의 세계에 살고 있는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시인을 경유해서 다시 돌아온 한국어는 더 눈부셨습니다. 허수경 시인의 한국어는 시인의 삶 이후에도 독자들 곁에서 더 찬란할 것입니다”라고 시인을 기렸다.
실제 허수경 시인의 지인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시인이 독일에 살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모국어의 어감과 가락이 시인의 삶과 시로부터 빠져나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마치 손아귀로부터 모래알들이 빠져나가 흘러내리듯이. 그러나 허수경 시인의 한국어는 언제나 눈보라처럼 살아 있었고, 계절을 만나 핀 꽃과도 같이 절정의 순간에 있었다.
함성호 시인의 추모사도 이어졌다. “그때 나는 당신이 사준 밥을 먹은 적이 있다. 당신의 시집 ‘혼자가는 먼 집’의 원고를 그저 한 번 읽어봐 주었다는 핑계로 얻어먹은 당신의 밥이 있다. 두고두고 나에게는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게 어떤 밥이었는데 (중략) 당신이 그 밥을 어떤 돈으로 샀는데 (중략) 나는 그만 당신의 노동을 얻어먹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당신에게 있어 서울살이가 얼마나 고된 일이었는지. 그 까맣고 작은 체구로 견뎌낸 시들이 얼마나 큰 절망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나중에 당신의 고된 서울살이를 듣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중략) 당신은 언제나 말과 함께 웃었다. 웃음 따로 말 따로인 적 없이 언제나 당신의 웃음은 말이었다.”
추모사가 이어지는 중간중간에 풍경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의 영혼이 움직이는 소리 같았다. 나는 예전에 시인과 몇 번 만났고, 또 시인으로부터 내 시집의 추천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시인은 참 순한 사람이었고, 나는 시인이 감자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고고학적 사유를 통해 인류사의 전쟁과 폭력의 지층을 반성적으로 발굴해낸 시인의 시편들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시인의 시적 관심사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와 난민 문제 등으로 확장되어 갔다. 시인은 나비와도 같은 몸으로 세계의 고통을 짊어지려 했던 사람이었다.
이병률 시인이 추모시를 읽었다. “선배는 다시 아프고, 조각조각 아팠어요. 선배의 하늘 한 켠과 여기 남아 있는 우리의 하늘 한 켠이 맞닿는 날이 오기도 전인데, 당신은 사라져 없어졌네요.”
소전 의식이 있었고, 송가 ‘빛으로 돌아오소서’를 불렀다. 시인의 유품이 조화(弔花)와 함께 불길 속으로 던져졌다. 나는 시인의 영정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국의 낯선 도심 광장에 시인은 왜소하고 마른 몸으로 엷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러나 꼿꼿했다. 그 영정사진을 연기가 감싸는 것을 보았다.
49재가 끝난 후 나는 중흥사 절마당에서 허수경 시인의 시 ‘나는 춤추는 중’을 가만히 읊조렸다. ‘기쁨은 흐릿하게 오고 / 슬픔은 명랑하게 온다 // 바람의 혀가 투명한 빛 속에 / 산다, 산다, 산다, 할 때 // 나 혼자 노는 날 / 나의 머리칼과 숨이 / 온 담장을 허물면서 세계에 다가왔다 // 나는 춤추는 중 / 얼굴을 어느 낯선 들판의 어깨에 기대고 / 낯선 별에 유괴당한 것처럼’.
북한산 계곡은 금방 어둑어둑해졌다. 바람은 얼음처럼 차가워졌지만 깨끗했다. 금방이라도 푸른 별이 하늘의 한복판에 돋아날 것 같았다. 나는 투명한 세계를 두고 산을 내려왔다.
허수경 시인의 고향 경남 진주에서 시인을 기리는 모임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갈증을 풀 길 없는 청년들은 작은 술집에 앉아 먼 세계의 빛을 이야기 하던 곳 // 작은 강이 흐르고 / 강 옆에는 대숲이 있고 / 늙어가는 여자들과 남자들이 대숲 아래에서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는 곳’이라고 쓴 시인의 미발표작 ‘진주라는 곳’도 공개되었다고 한다. 시인의 생전 작품들도 재출간돼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시인은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시인의 문장들은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시인은 이렇게 써서 당부했다. ‘청명한 오늘만을 살라고! 오늘만이 삶이라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