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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지금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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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11-15 19:00:40
  •  |  본지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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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갭이어(Korea Gapyear)를 창설한 안시준 대표는 젊은 청년이다. 그는 어릴 때 땅 끝까지 무전여행을 해본 경험, 대학생 때 학업을 접고 현지에서 돈을 벌며 전 세계를 여행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에 갭이어(Gapyear)라는 문화를 가지고 왔다. 갭이어는 말 그대로 자신의 인생에 틈을 갖는 시간을 말한다. ‘잠시 멈추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지칭하는 용어가 있다는 것은 그런 문화가 당연하게 정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바로 우리에게는 없는 것.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세계의 많은 청년에게는 1년 이상의 갭이어 기간을 갖는 것이 낯설지 않다. 자신의 꿈이 우유의 맛을 감별하는 ‘밀크 테이스터’라서 일본 전역의 물맛을 보러 여행을 다닌다는 청년이 있는가 하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스너글(SNUGGLE)이라는 직업으로 누군가를 껴안아주고 위로해주는 일을 하는 청년도 있다.

당장 내 아이가 전 세계를 다니며 다른 사람을 껴안아주는 일을 하겠다거나 밀크 테이스터가 되기 위해 시험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물맛을 보러 몇 년 동안 돌아다니겠다고 하면 나는 흔쾌히 그러라고 허락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부모인 나의 허락이 필요한 일일까? 스스로 그렇게 하는 청년들과 하지 못하는 청년들을 만들어내는 차이는 무엇일까?

내가 대학을 들어갈 때는 고3을 지나면 무조건 다음 단계는 대학을 가는 것이었다. 지금 고3도 별반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학과가 적성에 맞든 안 맞든 어떻게든 점수에 맞추어 대학을 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무난히 잘 진행되던 인생의 대열에서 낙오자가 되거나 실패자가 되는 것이고,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게 된다는 두려움이 컸다. 남들처럼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차곡차곡 계단을 올라가야만 ‘정상적인 삶’이란 생각은 누가 일부러 강요하지 않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내가 인지한 삶의 지표였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럴 필요도 없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잠시 쉬었어도, 이 계단이 아니면 내려갔다가 다른 쪽의 계단을 다시 올라 봐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스스로도 다른 계단을 살펴볼 여유나 넓은 견해를 갖지 못했으며, 이미 올라온 계단을 다시 내려갈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만약 지금 내 아이가 계단 중간에서 더 이상 올라가고 싶지 않은데, 또는 잘못 올라온 것 같은데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다시 내려가도 괜찮다고 말해 줄 것이다. 얼마든지 다른 계단들이 있으며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도 되고, 다른 계단을 찾아봐도 된다고 일러주고 싶다. 그게 삶을 먼저 살아온 선배가 유일하게 해줄 수 있는 어른 행세가 아니겠는가?

오마이 뉴스를 창건하고 지금은 덴마크 교육의 전도사가 되어 행복학교를 운영하는 데 온 열정을 다하고 있는 오연호 대표는 덴마크와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차이가 실패를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했다. “지금 잘하지 않아도 된다” “다시 하면 된다”고 끊임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국가 제도와 사회적 문화가 제공해 주는 곳이 덴마크이다. 심지어 교도소 죄수들에게도 다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수감원들에게는 사회와 접할 수 있도록 매일 바깥 외출이 허락되고, 교도소 방문객의 안내를 수감원이 맡으며 심지어 교도소는 주택가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문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그것을 지원해주는 문화가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면 좌절과 절망으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험 성적 때문에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매년 끊이지 않는다. 생면부지의 그 학생들에게 어른으로서 많이 부끄럽고 미안하다. 다시 해도 된다고 얼마든지 다시 해도 된다고 어른들이 말해주었어야 했다.

이건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말이 아니다. 퇴직을 하고, 하던 일을 바꾸거나 그만 두어야 하는 많은 사람에게도 다시 해도 된다는 희망과 위로가 필요하다. 단순한 감성적 위로가 아니라 국가적 제도와 사회적 문화가 만들어내는 든든한 응원이 말이다. 실패를 실패가 아닌 경험의 축적으로 만들어 줄 이 힘 있는 말이 너무나 절실하다. “지금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

부산시 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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