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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수의 세설사설] 11월의 노래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11-11 19:13:20
  •  |   본지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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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생각해 보면 가을은 아무래도 만추가 제 멋이다. 초추는 가을이 여물지 않아서, 중추는 그 아름다움이 너무 흐드러져서 오히려 혼란스럽다면 모든 것을 다 내주고 조촐하게, 혹은 겸손하게 물러앉은 만추는 그래서 눈물겨운 바 있다.

내년이면 불황이 깊어질 것이라고, 정치는 난마처럼 얽힐 것이라고 신문들은 우울한 소식을 전하고 있지만 우리네 소시민이야 그런 걱정은 잠시 잊고 가을을 보내며 마음의 단장을 해봐도 좋을 것 같다. 글쎄, 시 한 구절이 아니면 또 어떠랴.


만추다. 저녁 나절 교정을 바삐 가로지르는데 낙엽이 머리 위에 우수수 흩어졌다. 머리칼에 달라붙은 마른 잎새 하나를 떼어내다 문득 세월의 빠름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벌써 11월 하고도 중순이지 않나. 지난봄 우아하게 봄을 장식했던 목련도, 유백색으로 천지를 화사하게 물들였던 벚나무도 그 잎이 누렇게 시들어 떨어지고 있는 거다.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에 선 농부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올 한 해 나는 뭘 했던 거지, 하는 새삼스러운 안타까움이 스쳐갔다. 누군가와의 약속에 시간 맞춰 바삐 가야한다는 것도 잊고 나는 포도(鋪道)를 이리저리 돌돌 굴러다니는 낙엽을 한참이나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루하루 분주하게 살다가 문득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순간이 있지 않나. 지난해 지금쯤 나는 뭘 하고 있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의식하지 못하는 새 시간이 죽은 곤충의 껍데기 같은 잔해를 남기고 저만치 달아난 걸 느낄 때 나는 속절없어진다. 이럴 땐 신문과 방송에서 쏟아지는 온갖 잡담에서 벗어나고 싶어진다. 미국 중간선거 결과가 어떠니, 북핵 회담이 연기됐느니, 미세먼지가 누렇게 하늘을 덮었다느니…. 게다가 어떤 악덕 기업인이 옛날의 부하직원을 불러다 조직폭력배처럼 주먹을 마구 휘두르는 참혹한 영상 따위는 기억에서 쫓아내고 싶어진다. 글쎄, 이럴 땐 따따부따 시비를 가리는 칼럼보다는 에세이풍의 가벼운 이야기나 주절거리고 싶어진다. 아니, 편지지를 꺼내 누구에겐가 길고 긴 육필의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이 된다.

글쎄, 이 가을엔 작은 기쁨도 있었다. 꽃씨를 뿌려만 두고 단 한 번도 돌보지 않았는데도 내 누옥의 옥상에서 수십 포기의 야생화가 초가을 소담스런 꽃을 피웠던 것. 도심의 먼지와 소음을 이겨내고 한여름의 더위와 비바람을 견뎌내 마침내 청초하게 피어난 꽃들의 의지가 고마웠다. 이렇게 경이로운 순간이 있어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가을은 아무래도 만추가 제 멋이다. 11월은 턱밑에까지 치켜든 겨울에 쫓겨 종종걸음을 치는 마음 바쁜 계절이기도 하지만 가장 짙은 우수가 쌓이는 계절이 아닐까. 그 우수는 진록의 비만을 털어버리고 제 몸의 잎새를 떨구어 야위어 가는 가을 산을 닮은 투명한 빛깔일 테다. 초추는 가을이 여물지 않아서, 중추는 그 아름다움이 너무 흐드러져서 오히려 혼란스럽다면 모든 것을 다 내주고 조촐하게, 혹은 겸손하게 물러앉은 만추는 그래서 눈물겨운 바 있다. 이런 날은 함양의 상림 숲, 수북이 쌓인 활엽을 밟으며 마냥 걷고 싶지만 우리네 삶이 그런 감상을 좀체 허락하지 않으니 그 또한 사치랄밖에.

문득 고등학교 때 배웠던 오래된 문장이 머리를 맴돈다.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 뜰의 낙엽을 긁어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건만, 낙엽은 어느 새 날아 떨어져서, 또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의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가 보다.(…) 벚나무 아래에 긁어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엣것부터 푸석푸석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낮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자욱해진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소설가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란 수필의 한 구절. 젊어 한 시절 나는 낙엽을 태울 때조차 ‘갓 볶아낸 커피 냄새’를 맡아내는, 식민 치하 심약한 지식인의 딜레탕트 취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선지, 아니면 나 역시 새벽에 홀로 깨어 커피 한 잔 내려 마시는 걸 지복(?)으로 여기게 됐기 때문인지 이효석의 그 감각적 표현이 이제는 오히려 그럴싸하게도 느껴진다.

뒤미처 이런 시구절도 떠오른다. 젊어 죽은 시인 기형도의 ‘가을에1’.

‘잎 진 가지에 / 이제는 무엇이 매달려 있나 / 밤이면 유령처럼 / 벌레 소리여/…// 네 소리 / 잎 진 빈 가지에 / 내가 매달려 울어볼까 / 찬바람에 떨어지고 / 땅에 부딪혀 부서질지라도 / 내가 죽으면 / 내 이름을 위하여 빈 가지가 흔들리면 / 네 울음에 섞이어 긴 밤을 잠들 수 있을까’.

스물아홉 젊디젊은 나이에 컴컴한 심야극장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시인의 비극적인 죽음과 겹쳐지면서 눈물겨운 감회를 자아낸다. 가을의 정경을 그려내는 게 어디 잎 진 빈가지뿐일까. 시인 안도현은 ‘단풍나무 한 그루’라는 시에서 가을을 이렇게 노래 부른다.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여야겠다고 / 가을 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 오도 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 / 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먹고살기도 힘든 세상에 시 구절이나 들먹이다니 감상이 지나치다고 눈살을 찌푸릴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11월은 그런 계절이다. 단풍잎 동동 떠내려 오는 차가운 계곡물에 손을 담그는 느낌, 끊임없이 바람에 날리며 풍화해 가는 산등성이 억새의 풀씨를 지켜보는 느낌. 청량한가 하면, 끊임없이 가벼워지는 그런 계절이 아닐까. 그 가벼움은 천성적인 가벼움이 아니라 삶의 무거움을 떨어낸,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과 같은’ 그런 가벼움일 터이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세월의 변화를 깨닫는 그런 가벼운 수척감을 지켜보고 싶다.

만추에는 소리도 있을 터. 그 소리는 조금씩 스산함을 더해가는, 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라고 하면 어떨까. 아니면 깊은 밤 저 홀로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일지도.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냇물 소리를 일러 ‘소나무가 퉁소 소리를 내는 것으로 들리면 듣는 이가 청아한 탓이요,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 하면 듣는 이가 분노한 탓이요, 거문고가 궁우에 맞는 듯 들리는 것은 슬픈 탓’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가을의 소리는 청아한 퉁소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도심의 소음 속에 묻혀 사는 처지이니 청아한 마음을 가지려 해도 밤새 들을 냇물소리가 없는 게 딱하긴 하지만.

이왕 옛글 한 토막 들먹였으니 가을을 노래한 당시(唐詩) 한 편도 들먹여 보겠다. 두보의 ‘추흥(秋興)1’. ‘찬 이슬 내려 단풍은 물드는데 / 쓸쓸한 무산(巫山) 골짜기를 가면 / 강 물결 일어 하늘에 치솟고 / 변방을 어둡게 뒤덮는 구름 / 국화는 또 피어 다시 눈물짓고 / 배는 매인 채라 / 언제 고향 돌아가리 / 백제성(白帝城)을 흔드는 저 다듬이 소리’.

아닌 게 아니라 쓰다 보니 너무 감상에 치우친 듯도 하다. 하기야 이효석은 ‘낙엽을 태우면서’의 다른 대목에서 이렇게 쓰지 않았던가.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음영과 윤택과 색채가 빈곤해지고, 초록이 전혀 그 자취를 감추어버린, 꿈을 잃은 허전한 뜰 한복판에 서서, 꿈의 껍질인 낙엽을 태우면서 오로지 생활의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경주에서 감포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국도를 달려가고 싶다. 해질녘 황야의 리어왕처럼 외로이, 그리고 비장하게 서 있을 두 기의 감은사지 석탑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는 모습을 하염없이 보고 싶다. 이견대 앞바다에 서서 대왕암에 철썩거리는 파도를 보고 싶다. 가는 길목에 기림사에 들러 시원한 물 한 바가지를 꿀꺽꿀꺽 마시고 남은 물일랑 절 마당에 휙 뿌려도 좋으리라.

다가오는 겨울은 여느 해보다 더 추울 것이라는 기상청의 장기 예보다. 내년이면 불황이 깊어질 것이라고, 정치는 난마처럼 얽힐 것이라고 신문들은 우울한 소식을 전하고 있지만 우리네 소시민이야 그런 걱정은 잠시 잊고 가을을 보내며 마음의 단장을 해봐도 좋을 것 같다. 글쎄, 시 한 구절이 아니면 또 어떠랴.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일 것 같아’라는 양희은의 노래처럼 가을에 어울리는 노래 한 소절도 흥얼거려 보면서.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소설가·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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