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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수의 세설사설] 우리의 말과 글을 더는 학대하지 말라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10-07 19:03:05
  •  |   본지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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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문, 판결문에 동원된 어려운 한자, 일본식 조어는 국회나 법원의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거울이란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살다 보면 국민 누구나 송사에 휘말릴 수 있을 텐데 이런 판결문을 받아들고 절망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법령을 만들고, 재판하며, 각종 행정문서를 생산해 국민의 삶을 통제하는 정부, 국회, 법원은 올바른 우리말을 쓰는 데 더 노력할 일이다. 국민의 말글살이에 큰 영향을 가진 신문, 방송 종사자도 마찬가지. 문단의 말석에 있는 나를 포함해서 한국어로 작품을 쓰는 문학인들도 옷깃을 여밀 일이다.


   
몇 년 전 어쩌다 나는 법원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판결문의 문장을 분석해서 고칠 점을 지적해달라는 부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판결문이 지나치게 어렵다는 비판이 많던 때였다. 고등법원장실에서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강연장엘 보니 100명이 넘는 판사가 모여 있었다. 내 평생에 그렇게 많은 판사님네 앞에 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게다.

나는 그들에게 한 시간 반쯤 생각나는 대로 주워섬겼다. “무엇보다 판결문의 문장이 너무 길다. 얼추 세어보니 한 문장이 6700자가 넘는 것도 있더라. 원고지 30~40장 분량을 ‘~하고’ ‘~이고’ 해가며 복문으로 끝없이 한 문장으로 이어가는 여러분의 글쓰기 능력에 감탄(?)했다. 하지만 그걸 읽고 있자니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이런 이야기도 했다. “개신교 성경의 창세기 1장 1절에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생경한 표현이 있는데, 개화기 때 한국어를 잘 몰랐던 서양 선교사들이 번역했기 때문이다. 요즘엔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라고 바꾼 곳도 있긴 하지만, 100여 년 전에 도입된 일본어식 문체를 답습하는 한국 법원의 글쓰기는 개화기의 성경 번역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런 예화를 소개한 기억도 난다. “판결문을 받은 5명의 피고인이 ‘각자 500만 원을 배상하라’는 표현에 따라 1인당 500만 원을 배상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절망했는데, 실제로는 5명이 합쳐서 500만 원을 배상하라는 뜻이었다. 또 일반적으로 선한 뜻으로 이해되는 ‘선의’라는 표현이 민사소송 판결문에는 ‘실제의 사실과 다름을 모르고 있다’는 뜻으로 쓰이는 등 ‘법조인만 아는 외계어’가 법조문이나 판결문에 쓰이는 일이 많다.”

글쎄, 지적해야 할 일이 어디 그뿐일까. 법률 조문이나 판결문에 일상적으로 쓰이는 ‘편취(騙取)’라는 일본식 한자어가 ‘속여 뺏다’라는 뜻인 줄 아는 젊은 세대가 얼마나 될까.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에는 장해등급 판정과 관련해 ‘사지의 단(單)마비가 인정되는 사람’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네 팔다리 가운데 일부가 마비된 사람’이란 뜻으로 새길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다. ‘어깨관절의 경우에는 신전(伸展)·굴곡(屈曲)운동 및 외전(外轉)·내전(內轉)운동의 제한 정도에 따라 장해등급을 정하고’라는 구문을 ‘어깨관절은 팔을 펴고, 굽히고, 벌리고, 모으는 운동을 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장해등급을 정하고’로 쉽게 바꾸면 어디 동티가 나나.

그동안 ‘쉽고 정확한 판결문 쓰기’에 대한 법원의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니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런 구절을 보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진술을 내용으로 하는 진술이 전문증거인지는 요증사실과 관계에서 정하여지는데, 원진술의 내용인 사실이 요증진술인 경우에는 전문증거이나, 원진술의 존재 자체가 요증사실인 경우에는 본래증거이지 전문증거가 아니다’. 이 오묘한 꽈배기식 표현은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박근혜 국정 농단 사건’의 한 피고인에게 지난 2월 법원이 내놓은 판결문이 인용한 대목. 하다못해 한자도 병기하지 않고 줄줄 써놓은 이 문장의 뜻이 무언지 판사님들을 쫓아다니며 묻고 싶을 지경이다.

법조문, 판결문에 동원된 어려운 한자, 일본식 조어는 국회나 법원의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거울이란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살다 보면 국민 누구나 송사에 휘말릴 수 있을 텐데 이런 판결문을 받아들고 절망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공자 왈, 맹자 왈 한문책을 뜯어 읽는 건 우리네 몫이고 어리석은 백성일랑 땅이나 꿍꿍 파면서 시키는 대로 하라는 조선 시대 양반 사대부의 으름장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거다. 글쎄, 판결문을 일부러 어렵게 써서 국민이 변호사에게 달려가 소송대리를 의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동업자 영업 배려’ 때문이 아닐까 억측(?)한다면 판결문 아닌 내 심사가 배배 꼬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말을 오·남용한다고 비판받는 곳은 또 있다. 바로 TV라는 매체다. 지금 예능프로를 뜯어보면 말글을 업어다가 난장 맞힌다고나 할까, 우리말의 수난이 정도를 한참 넘었다. ‘아놔∼’ ‘축알못’ ‘fㅓㄴfㅓㄴ한 여행’….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암호 같은 자막 보면 어지럽다 못해 머리가 지끈지끈해지지 않던가. ‘아놔∼’는 황당한 말과 행동을 보았을 때, ‘축알못’은 축구를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을 이르는 표현이라고. ‘fㅓㄴfㅓㄴ’은 영어의 ‘fun’을 한국어 철자와 뒤섞은 거다. 방송국 사람들은 도대체 이게 진짜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개의 영상에다 ‘어서 오시개’라거나 ‘그런 말 마시개’ 따위의 말풍선을 달아놓은 걸 볼 때마다 방송국으로 찾아가 재치 있는 표현 하나 건졌다고 낄낄거릴 피디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시청자들도 귀가 있으니 출연자의 말을 다 알아듣는다. 질 낮은 온갖 농담을 친절(?)하게, 그것도 의도적인 엉터리 맞춤법을 동원해 일일이 자막으로 끼워 넣으니 이런 시각 공해가 따로 없다. 거듭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의 우리말 파괴가 해를 거듭할수록 심해지고 있다니 아예 우리 말글에 대한 테러범 수준이다.

오죽하면 최근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지상파와 종편 예능프로그램에서 무분별하게 쓰이는 신조어가 규정에 위반되지 않는지 감시에 들어간다고 발표했을까. 국민의 판단을 흐리는 ‘가짜뉴스’에 대한 단속과 더불어 우리 말글에 대한 대중매체의 학대 행위도 막아야 할 터.

이참에 개인적으로 귀에 걸리는 말도 들먹여 보겠다. 요리사(料理師) 주방장(廚房長)이란 단어가 언제 쑥 들어갔는지 ‘셰프’라는 외국어가 판을 치고 있다. ‘사(師)’나 ‘장(長)’에 존대의 뜻이 충분히 담겼는데도 ‘셰프’라고 불러줘야 대접하는 거란 식인데, 이런 말글의 사대주의도 반성해야 할 일. 구제역이나 조류인플루엔자에 걸린 가축을 산채로 한 구덩이에 파묻는 걸 뜻하는 ‘살처분(殺處分)’이란 말을 들으면 나는 소름이 끼친다. 인간의 탐욕을 만족시키려고 열악한 사육 환경에 애꿎은 짐승들을 몰아넣고는 떼죽음을 시키는 행위를 ‘처분’이라니. 한 조각의 미안함이나 부끄러움도 담겨 있지 않은, 우리네의 야만과 비정이 압축된 단어가 아닐까.

타국에 의해 말글이 빼앗긴 민족의 슬픔을 담은 이야기는 늘 우리의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 폴란드 어느 여학교에서 비밀리에 폴란드어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요란한 벨소리와 함께 러시아 장학관이 들이닥치자 학생들은 교재를 허겁지겁 숨기곤 바느질감을 집어 들었다. 장학관이 교실을 훑어보고는 반장을 일으켜 세웠다. “폴란드를 다스리는 황제가 누구시냐?” 소녀가 대답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입니다.” 장학관이 사라지자 소녀와 급우들, 선생님은 한데 엉켜 눈물을 흘렸다. 그 소녀는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았던 물리학자 마리 퀴리다. 그런가 하면 프러시아와의 전쟁에 져서 프랑스가 알자스 지방을 빼앗겼을 때, 프랑스어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프랑스 수업을 하는 장면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도 자주 들먹여지는 소설이다.

우리 말글엔 그보다 훨씬 치열한 저항과 눈물의 역사가 담겨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어를 말살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에 한글학자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낸 게 바로 우리 말글이 아닌가. 엄혹한 그 시절, 한글학자들은 ‘조선인에 의한 조선어사전’을 만든다는 큰 뜻을 세웠다가 온갖 탄압을 겪었다. 1942년 33명의 어학자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른 ‘조선어학회사건’이 대표적이다. 이윤재, 한징 선생은 옥사했다.

후일담은 더 있다. 해방 후 옥에서 풀려난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선생 등이 북새통 속에 사라진 한글사전 원고 뭉치를 애타게 찾다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 처박힌 걸 찾아냈다. 출판사가 두 번이나 출간을 거절하자 이극로 선생이 책상을 치며 “나라문화 기둥인 한글사전을 외면해서야 될 말이냐!”고 호통쳤다. 그리하여 빛을 보게 된 것이 한글학회가 펴낸 ‘우리말 큰 사전’이다. 우리 말광을 지키려 고난을 감수한 선각들을 생각한다면 우리 말글을 어찌 우리 스스로 모욕하고 학대할 수 있는 건지.

   
법령을 만들고, 재판하며, 각종 행정문서를 생산해 국민의 삶을 통제하는 정부, 국회, 법원은 올바른 우리말을 쓰는 데 더 노력할 일이다. 국민의 말글살이에 큰 영향을 가진 신문, 방송 종사자도 마찬가지. 문단의 말석에 있는 나를 포함해서 한국어로 작품을 쓰는 문학인들도 옷깃을 여밀 일이다. 내일은 오백일흔두 돌 한글날이다.

소설가·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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