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묘백묘(黑猫白猫)’는 정말로 실용주의를 강조한 표현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흑묘백묘는 리더십의 요체를 꿰뚫은 표현이었다. 더 분명히 말하면, 리더십이 먼저고 실용주의는 나중이다. 1979년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미국을 방문한 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취지로 천명한 것이 흑묘백묘론이다. 이는 어떤 종류, 어떤 성격의 경제정책을 쓰든 경제를 살리고 인민의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이어 당시 교조주의 성격이 짙던 사회주의 중국의 경제 노선을 바꿔버린 실용주의 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제일 처음에는 중국 쓰촨 지역 속담인 ‘흑묘황묘’를 원용해 ‘검은 고양이든 누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물론 지금 와서는 이건 별로 안 중요하게 됐다.
흑묘백묘론을 놓고 거듭 생각해보면, 그 속에는 ‘검은 고양이가 됐든 흰 고양이가 됐든 리더로서 나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전체 판도를 통제하여 필요한 방향, 원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장악력과 자신감이 표현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장악력과 자신감의 바탕에는 전체를 조망하는 리더의 철학이 깔려 있다. 흑묘백묘는 리더의 이런 자신감, 장악력, 철학을 만방에 천명한 것이다. 고양이의 색깔과 종류는 그 다음이다. 덩샤오핑은 ‘나는 준비가 돼 있고 가야 할 길을 알며 자신 있다’는 말을 한 것이다. 일단, 고양이는 잊어도 된다.
이 점을 놓치면, 흑묘백묘는 정말이지 단순한 선택의 문제 또는 선택의 자유 문제로 제한돼 버린다. 그런 ‘실용주의적’ 선택을 한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심지어 엉망진창이 돼 버린다 한들 거기에 관해서는 별로 말해줄 수 있는 게 없는 앙상한 존재가 된다. 오거돈 부산시장의 ‘문화정책’에 관해서는 현재까지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큰 그림이 무엇이고, 방향은 어떠하며, 내용은 어떻게 채울지 손에 잡힐 만큼 알려진 게 없다 . 이럴 경우 문화 관련 기관의 인사가 이뤄지는 방향이나 상황을 통해 미루어 보는 방편이 있다. 시정이든 국정이든 절대 리더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인사의 방향은 중요한 지표가 된다. 그런데 이 부문 또한 좀 어지럽고 종잡기 힘들다는 인상이 주로 있을 뿐 어디로 가려는지 무엇에 힘을 실을지 지금으로는 잘 알기 어렵다.
우선 급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이 정의인가 효율인가? 아니면 수월성인가 지역성에 바탕을 둔 지역문화 토대 다지기인가? 이런 얼개가 제대로 제시되지 않은 점을 단지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문화가 상대적으로 뒤에 있어서 그런 것으로 이해해야 할지 아니면 더 기다려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현재 부산발전연구원이 주축이 되어 ‘부산 문화 비전과 전략 2030’을 새로이 잡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지금 같은 형편이라면 그것이 선다 한들 시정에 어느 정도 반영될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간다. 특히 문화 영역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보다는 방향이라고들 말하지만, 이는 두 요소가 무관하다는 뜻이 아니라 둘의 상관관계를 나타낸다. 방향이 제대로 제시되거나 공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각각의 요소가 개별적으로, 통일감 없이 각각 진행되면 여러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그것이 만약 문화 영역 기관의 인사와 관련된 것이라면, 적절치 못한 외부의 입김과 영향력이 강해질 공산이 커진다. 관계된 사람들은 영향력이 크다고 알려진 외부의 라인을 찾아다니며 ‘좋은 말’만 할 것이고 , 필요한 인재가 가져야 할 요건과 자격에 관한 기준은 흔들리거나 혼란스러워지기 쉽다. 만일, 실제로 그런 식으로 일이 이뤄지기 시작하면 그것이 혼란의 신호탄이 되기 쉽다.
흰 고양이를 택할 수도 있고, 검은 고양이를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우선은 중요한 게 고양이가 아니다. 아니, 고양이만 중요한 게 아니다. 리더의 철학, 방향, 자신감이 있느냐.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 이것을 자꾸 생각하게 된다. 이런 데서 모자란 점이 있다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믿고 맡길 전문인을 찾거나 체계를 추가로 강구하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문화에 관한 한 부산은 할 일이 참 많은 도시다. 시간은 자꾸 가지만, 그래도 시간은 있다.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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