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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칼럼] 받은 것과 갚아야 할 것 /한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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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8-05 18:46:35
  •  |  본지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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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소식을 흑백 영상으로 만나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컬러 TV의 모니터에 비치는 빨간 꽃의 모습은 그동안 적록 색맹의 색채에 익숙해 있던 필자에게는 너무나 신비한 충격이었다. 당시 컬러 TV는 엄청난 부의 상징이었고, 대부분의 집에서는 흑백 모니터에 오색 셀로판지를 그럴듯하게 오려 붙여 컬러 TV를 흉내 내기도 하였다. 뼛속까지 차가웠던 동네 우물물 등목으로 한여름 밤의 더위를 식히고, 수박 한 덩이라도 자르면 반드시 앞뒷집과 나누어 먹었다. 가난했지만 사람 사는 정은 훈훈했던 1980년대의 추억이다.

   
1983년 11월, 레이건 대통령 내외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대통령 전용기에 오르는 낸시 레이건 영부인의 손을 4살, 7살 한국 어린이 두 명이 꼭 붙잡고 있었다. 당시 신문은 ‘심장병 두 韓國 어린이 渡美 치료 주선 낸시, 오늘 함께 歸國’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영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간 한국 어린이들은 무사히 심장수술을 받고 건강한 모습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한국에서도 심장수술을 하고는 있었으나, 단순 심장기형만 겨우 가능하였고 성공률도 낮았다.

지난 6월, 몽골에 의료봉사를 다녀왔다. 필자가 근무하는 병원에서는 35년 전 우리가 그랬듯이, 의료취약국의 심장병 어린이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무료 심장수술을 해주는 사업을 2004년부터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4개국(캄보디아, 필리핀, 베트남, 몽골) 95명의 아이를 수술했고, 올해도 5명의 몽골 어린이를 초청할 예정으로 드디어 누적 100명의 아이에게 새 심장, 새 생명을 선물해 줄 수 있어서 더 의미가 새롭다. 이전에 심장수술을 받았던 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자랐을지, 이번에는 어떤 아이들이 우리를 기다릴지, 벌써 4번째 방문하는 몽골이지만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몽골은 1980년대 우리나라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다. 의료가 취약한 몽골에서는 인근 인도와 중국으로 원정수술을 하러 가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이다. 우리 의료진을 찾아온 90여 명은 대부분 심장수술이 필요한 아이들이었다. 당장 수술을 서둘러야 할 아이, 여러 차례 단계적 수술이 필요한 복잡기형의 아이들…. 수술 시기를 놓쳐 아이젠맹거(Eisenmenger) 합병증으로 이제는 수술이 불가능해진 아이의 파랗게 변해버린 입술과 곤봉 모양으로 변해버린 손을 말없이 만져주면서 너무 미안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수많은 아이 중에서 환자의 건강상태와 수술의 시급성 등을 따져서 어렵게 선별하였지만, 예산 문제로 몇 명밖에는 초청하지 못하는 현실과 남겨진 아이들에 대한 걱정과 미안함으로 진료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기약 없는 약속을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낸시 여사의 도움으로 건강을 찾은 4살의 한국 꼬마는 그 후 미국에 입양되어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2004년 레이건 대통령 타계 소식을 접하고, 어린 시절에 선물로 받은 자신의 삶처럼 도움이 필요한 심장병 아이들을 위해 남은 인생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결국 그는 안정적 직장을 버리고, 자신의 심장수술을 후원해준 국제구호단체인 ‘생명의 선물(Gift of Life International)’ 직원이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심장병 어린이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수술을 앞둔 우간다 소녀의 손을 잡고 응원하는 모습이나 낸시 영부인, 한국의 친부모와 눈물로 재회하던 그의 모습에서 생명의 나눔, 봉사의 참된 가치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식의 심장수술 후 무료 자원봉사로 우리 의료진과 매년 땀을 함께 흘리는 몽골의 어머니들 역시 같은 마음일 것이다. 꼭 의사가 되어 자신과 같은 심장병 환자들을 고쳐주고 싶다던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몽골 밤하늘의 별빛만큼이나 곱고 아름답다. 도움을 주고, 받고, 갚는 것이 이렇게나 행복한 일이었던가?

부산백병원 흉부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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