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이별한 뒤로 여러 해 소식 없으니/변방에서의 삶과 죽음을 그 누가 알겠는가/오늘 아침 처음으로 겨울옷 지어 보내나니/울며 보내고 돌아올 때 뱃속에 있던 아이 편이라네’. 고려 말의 문인이자 학자인 정몽주가 쓴 ‘수자리 사는 병사 아내의 원망’이란 시의 첫 수다. 작중인물의 남편은 양인(良人)일 터이다. 고려와 조선의 군역은 16~60세의 양인이 떠맡았기 때문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군역을 피하려는 사람이 늘어나자, 조선 시대에는 군포(軍布) 2필을 내는 것으로 징병을 면제해줬다. 일종의 ‘병역대체금’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유지될 수 없었다. 지배층인 양반은 군역과 대체납세에서 제외되고 양인에게만 그 의무가 집중된 탓이다. 조선 후기 들어 ‘50만이 져야 할 군역을 10만이 부담하는’ 파행상까지 나타났다. 돈과 힘 있는 양인이 관리와 결탁해 군역을 면제받아 가난하고 무력한 양인에게 짐이 전가되면서다. 제도의 불합리를 해소하기 위해 양반 자제와 유생에게도 군포를 거두자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양반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흥선대원군 때 양반한테 군포를 받는 호포법이 실시됐지만 국운은 이미 기운 상태였다. ‘유전면역 무전군역(有錢免役 無錢軍役)’의 군정 문란이 조선 망국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던 셈이다.
전근대의 산물인 줄로만 알았던 이 폐습이 현대에도 행해지고 있다. 국민개병제 국가인 터키가 1만5000터키리라(약 350만 원)의 병역대체금을 받고 병역을 면제해주기로 했다고 한다. 이 정책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선거 공약인데, 젊은 층의 표를 의식한 포퓰리즘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이 정책이 발표되자 시중은행은 병역 미필자를 대상으로 한 대출상품 시판에 나섰고, 거래 중개 사이트에는 가축 농기구 부동산 등 군면제 자금을 마련하려는 급매물이 쏟아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터키는 군 복무기간도 대졸자는 5.5개월인 반면, 고졸 이하는 12개월로 불공평하다. ‘터키판 유전면역 무전군역’이다.
우리나라도 안심하긴 어렵다. 가진 자의 병역 기피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어서다. 최근에는 집권층의 군 사유화가 의심되는 계엄령 검토 문건도 공개돼 군의 정치적 중립 여부가 입길에 오른 마당이 아닌가. ‘국민의 군대’라는 본분을 잃으면 군정이 문란해질 수밖에 없다는 건 동서고금의 보편적 이치임을 되새겨야 할 때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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