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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수의 세설사설] ‘토지’에서 부산의 문화예술을 떠올리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7-15 19:35:36
  •  |   본지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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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건 높은 분들이 문화예술을 토목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거다. … 지원금 몇 푼 준답시고 아닌 밤에 홍두깨 격으로 문화예술계더러 돈을 만들어 내고 일자리를 만들어 내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원칙적으로 따지면 문화의 목표는 ‘산업화’가 아니다. 시민의 일상에 행복과 교양을 보태는 것이 진짜 존재이유가 아닌가.


부산은 과연 타지 예술인을 받아들여 몇 달씩 먹이고 재울 만한 아량과 인심이 있나. 길게 보면, 그게 바로 부산의 문화예술을 키우는 길이기도 한 거다. 부산 예술인들이 타지 작가들과 함께 머무르면서 예술을 토론하고 그들에게서 자극을 받고, 네트워크도 만들고…. 요컨대 진짜 ‘소프트 파워’를 키우는 데 관심을 기울여 보라는 소리다.
새벽녘 빗소리에 잠이 깼다. 나뭇잎에, 쇠 난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아슴아슴 귓전에 젖어든다. 어디선가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찌르레기, 개똥지빠귀 소리도…. 비에 깃털을 적신 까치 한 마리가 축축한 하늘 한 귀퉁이를 뚫고 푸르스름한 물안개 사이로 사라진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슬리퍼를 꿰고 우산을 받쳐 들고 방을 나선다. 다닥, 다다닥. 비닐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드럼 소리 같다. 문득 오래전에 본 어떤 영화의 대사 한 토막이 떠오른다. “우리가 듣는 빗소리란 건 비가 땅에 부딪치고, 돌에 부딪치고, 지붕에 부딪치고, 우산에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잖아. 그래서 우린 비가 와야지만 우리 주위에서 잠자고 있던 사물의 소릴 들을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지금 작은 연못의 연잎과 울창하게 늘어선 숲 속의 나뭇잎, 그리고 땅바닥에 낮게 깔린 노란 민들레의 속삭임을 듣고 있는 거다. 혹은, 마당에 놓인 디딤돌, 장독대의 합창을 듣고 있는 거다.

내가 여기, 강원도 원주 매지리 회촌 마을의 ‘토지문화관’에 머무른 지도 보름이 다 돼간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생전에 일군 토지문화관은 전국의 작가들을 대상으로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는데 나만 해도 이번이 두 번째다. 아무 조건도 없다. 두어 달 집필실을 겸한 숙소를 내주고 삼시 세끼 먹여주면서 조용히 책 읽고 글이나 쓰다 가라는 거다. 지금도 소설가, 시인, 희곡과 시나리오 작가 열댓 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곳 회촌 마을은 전나무 ‘회(檜)’자를 쓰는데, 그래 그런지 숲이 무성하다. 2층의 내 방 베란다에 나가면 떡갈나무의 검푸른 잎사귀를 만질 수도 있다. 새벽녘 축축이 젖은 숲에선 알싸한 비린내가 훅 끼친다. 거칠지만 날것 그대로인 생명의 냄새다. 저녁엔 슬리퍼를 끌고 동네 고샅을 한 바퀴 어슬렁거린다. 텃밭의 옥수수는 검붉은 수염을 늘어뜨렸고, 도라지꽃, 깨꽃도 한창이다. 봉숭아, 채송화, 맨드라미 따위 정겨운 토종 꽃들도 농가 담장 밑에 소담하게 피어 있다. 마을 뒤편 성황당은 신령스럽기도 하고, 약간은 무서운 분위기이기도 한데 박경리 선생의 ‘김약국의 딸들’의 첫 장면을 연상시킨다. 아름드리 엄나무가 늘어서 있고, 어른 서너 아름 굵기의 칠성목도 있다.

귀한 지면에 팔자 좋은 소리나 늘어놓고 있다고 눈을 흘기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로선 학생들을 가르치고, 성적을 매기느라 나름대로 시달린 끝에 얻은 귀한 시간이니 생광스러울 수밖에. 전국에서 모여든, 연배가 20~60대에 걸친 작가들은 다들 제 방에 틀어박혀 열심히 뭔가를 쓰는 눈치이기도 하다. 식당에 모여 밥을 먹을 때에도 그들은 하안거에 든 선승처럼 곰곰이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밤엔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다.

문화관 한쪽엔 박경리 선생이 살던 집이 보존돼 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정갈한 거처인데, 마당가엔 백 개가 넘는 장독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이곳에 머무르는 작가들이 먹을 일 년 치 장을 숙성시키는 거겠지. 박 선생은 생전에 직접 키운 푸성귀를 씻어 입주 작가들에게 나르곤 했다고 한다. 숙사 휴게실엔 박경리 선생이 쓴 시를 누군가가 붙여 놓았다. ‘멀리서 더러 보기도 하지만 방 안에서도 나는 그들을 느낄 수 있다. 논둑길을 나란히 줄지어 가는 아이들처럼 혼신으로 몸짓하는 새 새끼처럼 잔망스럽게 혹은 무심하게 머물다 가는 구름처럼 그들은 그렇게 내 마음에 들어오는 대상이다. 회촌 골짜기를 떠나 도시로 가면 그들도 어엿한 장년 중년 모두 한몫을 하는 사회적 존재인데 우습게도 나는 유치원 보모 같은 생각을 하고 모이 물어다 먹이는 어미 새 같은 착각을 한다(후략)’.

나는 원로작가 여러 분을 생전에 뵐 기회를 더러 얻었지만 아쉽게도 박경리 선생은 뵙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어미 새’ 같은 박 선생의 날개 밑에서 그가 물어다 먹이는 모이를 받아먹고 있는 게 아닌가. 이 토지문화관은 박 선생이 생전에 한 뜸 한 뜸 수놓듯 가꾸어낸 공간이지만, 운영을 위해선 일정 부분 원주시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을 터이다. 원주라는 도시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는 내가 여기 머물고 있는 것은 선생의 음덕을 입은 셈이다. 하지만 한 작가의 유업을 이어받아 꾸준히 작가들에게 창작 공간을 내주는 원주라는 소도시의 신세도 지고 있는 거다. 한 도시의 문화적 품격이랄까, 넉넉한 품은 그 도시와 인연을 가진, 큰 문화예술인을 기리려는 시민들의 마음 씀씀이에서도 나오는 게 아닐까.

그렇게 보면, 내가 사는 부산이란 도시의 문화적 품격을 말하기가 민망해질 때가 있다. 당장, 작가를 위한 이런 창작공간만 해도 서울에도 있고, 경북 전남 강원도 곳곳에 산재해 있지만 부산엔 마련돼 있지 않다. 만들어 볼 생각도 않는다. 글쎄, 요즘 부산에선 오페라하우스를 만드느니 어쩌느니 설왕설래하고 있지 않나. 영화도시란 브랜드를 키우느라고 많은 돈을 쏟아 붓기도 한다. ‘선택과 집중’이란 관점에선 어쩌면 필요한 정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쉬운 건 높은 분들이 문화예술을 토목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거다. 문화예술을 ‘삐까번쩍한’ 건물을 지어 높은 분들이 우르르 몰려가 테이프나 끊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는 거다. 지원금 몇 푼 준답시고 아닌 밤에 홍두깨 격으로 문화예술계더러 돈을 만들어 내고 일자리를 만들어 내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원칙적으로 따지면 문화의 목표는 ‘산업화’가 아니다. 시민의 일상에 행복과 교양을 보태는 것이 진짜 존재이유가 아닌가. 살풍경한 도시에 인간의 얼굴을 입히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키우자는 게 아니라 ‘시민의 행복’을 위한 지출인 거다.

재능 있는 청년들이 서울로 간다고 답답해하기 전에 청년 문화예술인을 위한 창작공간부터 만들어 보면 어떤가. 여기 토지문화관 같은 곳을 만들어 한 1년쯤 먹이고 재워가며 마음 놓고 소설이나 시, 시나리오나 드라마 작업을 하도록 돕는 게 텅텅 비워놓을 거대한 건물을 세우는 것보다 효과적일 거다. 돈도 몇 십분의 일, 몇 백분의 일밖에 들지 않을 거다. 문화산업도 결국 사람이 일으키는 것이고, 사람이 모여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어디 공간만 그렇겠나. 내 생각엔 부산 문화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예산의 절대 규모보다도 돈의 쓰임새가 헐렁한 데 있는 것 같다. 무슨 ‘국제’란 이름만 붙이면 그 행사의 내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해마다 몇 억 원을 척척 보태주면서 정작 필요하고 실속 있는 사업엔 눈을 돌리지 않는다. 부엌데기 국솥 푸듯 이 사람, 저 사람에게 200만~300만 원 푼돈을 배급하듯 던져줘서 내용도 부실한 소설책, 시집 권수나 늘린다고 지역 문학이 발전하진 않는다.

그뿐인가. 부산 출신 문화예술인을 기리는 사업에도 인색하기 그지없지 않나. 박경리 같은 걸출한 문화예술인이 안 나와서 그렇다고? 왜 없나. 요산 김정한이나 향파 이주홍 선생도 있다. 광복군에서 활동하며 독립군가인 ‘압록강 행진곡’을 작곡하고 해방 후 부산에서 후진을 가르치며 호젓이 살다 간 먼구름 한형석 선생도 있다. 왜 우리 자신의 눈이 아닌 타자의 시선에 매달리나. 왜 그렇게 자신이 없나. 요컨대 문화적 거인의 존재는 지역사회가 기리기 나름인 거다. 그렇게 보면 문화행정의 요체는 결국은 문화예술에 대한 안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차차, 선물처럼 주어진 원주에서의 ‘여름나기’ 자랑질(?)을 하다가 얘기가 옆길로 샜다. 어쨌거나, 나는 문화예술이란 회임(懷妊)기간이 오랜 임신부와 같다는 이야길 하고 싶은 거다. 부산은 과연 타지 예술인을 받아들여 몇 달씩 먹이고 재울 만한 아량과 인심이 있나. 길게 보면, 그게 바로 부산의 문화예술을 키우는 길이기도 한 거다. 부산 예술인들이 타지 작가들과 함께 머무르면서 예술을 토론하고 그들에게서 자극을 받고, 네트워크도 만들고…. 요컨대 진짜 ‘소프트 파워’를 키우는 데 관심을 기울여 보라는 소리다.

지금 한적한 토지문화관엔 소설가와 시인들이,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들이 밤을 하얗게 새우며 노트북과 씨름하고 있다. 이곳이 한국문화예술의 산실까지는 몰라도 ‘인큐베이터’쯤은 되지 않을까. 하안거를 마치고 이곳을 떠날 무렵 그들의 바랑엔 심마니의 그것처럼 천종삼 한두 뿌리는 들어 있을 것 같다.

소설가·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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