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산메디클럽

[감성터치] 관찰의 근력 /허소희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6-24 18:51:31
  •  |  본지 30면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20대의 많은 시간을 거꾸로 앉아 보냈다. 몇 년 전만 해도 KTX 고속 열차는 역방향 좌석을 조금 더 싸게 팔았었다. 가난한 집의 둘째 딸이라는 태생을 버리지 못했기에 언제나 기차표를 역방향으로 골라 끊었다. 몇백 원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누군가는 어지럽다고 했지만, 반대 방향으로 앉아가면 지나온 길을 볼 수 있어 나름대로 괜찮았다. 다가오는 길은 보지 못해도, 달려온 곳을 곱씹을 수 있는 자리였다.

저 멀리 점으로 사라지는 풍경은 평소와는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빠른 속도 탓에 어딘가로 쑥 빨려 들어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특히 부산으로 돌아올 때면, 그리운 사람들이 익숙한 곳에서 나의 허리춤을 잡아당기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늘 같은 방향만 보았다면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나온 아기는 백 일을 기다려 뒤집기를 시도한다. 두 발을 들어 올리고, 등허리의 반동을 이용해 제 몸을 휙 뒤집어버린다.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순간이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세상과 마주하기 시작한다. 백 일을 기점으로 아기의 세계는 대폭 팽창한다. 보는 것만큼 세상을 실감할 수 있는 건 없기 때문이다.

잘 보는 것은 세상과 나의 관계를 밀도 있게 만들어준다.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힘으로 기억력, 상상력 그리고 관찰력을 꼽는다. 그중에서 으뜸은 주변을 관찰하는 습관이라 한다. 짧은 순간에도 진심 어린 표정을 포착하고, 거리의 가로수에서 역사를 발견하는 관찰의 힘은 인생을 실감 나게 한다. 그리고 내 몸 밖의 또 다른 박동 소리를 듣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삶을 실감할 수 있는 좋은 도구다. 드라마, 영화, 음악, 소설, 웹툰처럼 일상에 가까이 있는 예술은 자잘한 기쁨을 던져준다. 편안하게 누워 TV를 켜거나, 이어폰을 끼고 좋아하는 음악에 귀 기울이는 시간은 마음이 절로 열리게 한다. 복잡함으로 가득 찬 인간의 감정을 조건 없이 위로한다. 그리고 알게 한다. 인생은 커다란 목표나 의미가 아니라 작은 것의 축적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신과 의사 노다 마사아키는 삶의 의미를 묻기 전에, 기분 좋게 살고 있다는 실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생기 있는 마음만큼 힘찬 수레바퀴는 없다. 기쁨의 조각이 아무리 작더라도 하나둘 모이면 인생을 저절로 앞으로 끌고 나간다. 매일 걷는 길에서 살짝 벗어나 새로운 동네를 만나고, 같은 시간 라디오를 챙겨 들으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이들은 삶의 순간을 만끽하는 인생의 고수다.

얼마 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초급 미술반에 등록했다. 수채화 물감을 짜고, 천천히 연필을 깎는 건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표현주의 화가처럼 ‘과감한 붓질로 나의 세계를 표출할 테야’라는 포부가 무색하게 선생님은 컵 하나만 바라보게 했다.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컵을 끈기 있게 관찰해, 스케치북에 그대로 옮기는 것이 과제였다.

눈앞의 컵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는 보고, 그리고, 보고, 지우는 동작을 쉬지 않고 반복해야 했다. 두 시간 동안 탁자의 컵을 노려본다고 머리에 연달아 쥐가 내리는 기분이었지만, 몇 번을 해내고 나니 손목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허투루 보아 넘겼던 것들에서 그림자와 윤곽선을 읽어내게 되었다. 또 미세하게 길러진 관찰의 근력은 그동안 나의 시야가 평면의 세계에 머물러 있었음을 깨닫게 해줬다.
누구나 타인에게 규정되고 호명되는 인생이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고 만끽하는 삶을 꿈꾼다. 우리는 이미 온몸을 뒤집는 노력으로 커다란 시야를 선물 받았다. 다행히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는 듯하지만, 내 주위를 한 바퀴 돌아 지금과는 조금은 다른 곳에 매번 착지한다. 그래서 점차 나아가는 인생의 눈금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예술은 호기심의 눈을 빌려 내 삶의 둘레를 실감하게 한다. 미미한 눈금일지라도 인생의 총량을 가득 채우는 귀중한 열쇠가 되어줄 것이다. 이 기특한 도구를 사용해 많은 사람이 행복의 스펙트럼을 넓혀 나가길 바란다. 그 힌트가 엄숙한 미술관이나 전문가의 작업실이 아니라, 자신을 마주하는 고요한 순간과 생경한 풍경을 찾아 나서는 용기 있는 발걸음에 닿아 있음을 믿는다.

미디토리 협동조합 팀장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건강한 부산을 위한 시민행동 프로젝트
많이 본 뉴스 RSS
  • 종합

  • 정치

  • 경제

  • 사회

  • 스포츠

부울경 국회의원에 듣는다
민홍철 국방위원회 민주당 간사
부울경 국회의원에 듣는다
이채익 행안위 한국당 간사
강동수의 세설사설 [전체보기]
‘한반도 비핵화’ 탈출로 찾아내야 할 평양 정상회담
어른들은 모르는 방탄소년단의 ‘방탄’세상
강동진 칼럼 [전체보기]
활력이 넘치는 교토의 특별한 비밀
부산에 누워 있는 에펠탑이 있습니다
기고 [전체보기]
‘Going Together’ 캠페인으로 선진 정치문화를 /이대규
리차드 위트컴 장군과 세계시민정신 /강석환
기자수첩 [전체보기]
‘김지영 논란’ 유감 /이승륜
한국당 부산의원, 더 반성해야 /정옥재
김용석 칼럼 [전체보기]
생활 SOC: 천사도 디테일에 있다
한여름의 몽상: 부산의 다리들이 가리키는 ‘길’
김정현 칼럼 [전체보기]
‘미스터 션샤인’ 오해
통일 vs 평화공존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김경수·오거돈 선거공약 1호 운명은? /김희국
시, 독립투사 발굴 앞장서야 /유정환
도청도설 [전체보기]
폼페이오 추석 인사
백두에 선 남북 정상
문태준 칼럼 [전체보기]
고요한 물
폭서(暴暑)와 피서(避暑)
박무성 칼럼 [전체보기]
‘밥 한 공기 300원’의 미래
교육부가 만드는 ‘대학 살생부’
박창희 칼럼 [전체보기]
서부산 신도시,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설 [전체보기]
공급 확대로 선회한 주택정책, 지방은 뭔가
법원행정처 폐지 사법부 개혁의 시작일 뿐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국민연금 개혁, 공론조사가 필요하다
지금 ‘복지국가 뉴딜’이 필요하다
장재건 칼럼 [전체보기]
미친 집값과 서울 황폐화론
포스트 노회찬, 정의당만의 몫일까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