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산메디클럽

[인문학 칼럼] 각색된 젠더 혁명 /박형준

동화 돼지책 각색 뮤지컬, 여성의 주체성 축소하고 가부장적 모순·적폐 은폐…순응적 동심주의 아쉬워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5-30 19:31:15
  •  |  본지 31면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몇 년 전부터 그림동화 읽기와 비평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문학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탐문하는 작업이 동화나 동시에 관한 연구와 분리될 수 없다면, 이러한 끌림은 문학 연구자에게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직업적 소명보다는 일상생활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딸아이가 성장하면서 아내와 육아를 분담하게 되었다. 아이를 돌보는 저녁이면 함께 그림동화책을 읽곤 한다. 어여쁜 꼬마 숙녀가 잠들기 전, “그림동화책 한 권만 읽어주세요”라고 얘기한다면, 과연 어떤 아빠가 그러한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까.

딸아이와 같이 읽은 그림동화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 ‘돼지책’이다. 이 책은 유명한 동화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작품이다. 이야기의 대강은 이러하다. 아빠 피곳 씨와 두 아들 사이먼과 패트릭은 식사 준비와 설거지, 빨래 등과 같은 가사노동을 워킹맘인 엄마에게 모두 전가한다. 화가 난 엄마는 짧은 편지(“너희들은 돼지야!”)를 남긴 채 집을 나가버리고, 그녀의 부재는 세 사람이 반성하고 변화하는 계기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돼지책’의 서사 구조이다. 책의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며, 이는 여성의 불평등한 가사 노동이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될 것임을 지각하게 하는 서사적 장치로 기능한다. 아침, 저녁, 다시 아침…. 여성을 착취하는 구조적 도식이 이미 견고한 일상 속에 구축돼 있다. 그러므로 엄마의 탈주는 지배 질서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기 위한 적극적 저항 행위가 된다. 그것은 부조리한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실천적 동력으로, 프랑스의 저명한 사상가 질 들뢰즈는 이를 ‘탈주의 상상력’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 책을 동심(童心)을 파괴하는 ‘위험한 텍스트’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딸(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은 이보다 훨씬 더 무섭고 위태롭기 때문이다. ‘돼지책’은 남성 중심 가족주의의 폭력과 차별을 혁파할 수 있는 ‘여성/주체―되기(becoming)’를 강조하고 있다. 에필로그의 글과 그림이 이를 방증하는 예다. 앤서니 브라운은 불평등한 가족 구성원을 고장난 자동차에 비유하고 있다. 자동차의 번호판 ‘SGIP 321’은 피곳 씨와 두 아들을 상징하며, 그것은 수리(repair)하고 정비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엄마는 차를 수리했어요”에서 확인할 수 있듯, 고장 난 자동차(=가족)를 수리하는 주체는 여성이다. 작가는 억압과 착취 상태에 놓인 여성이 스스로 젠더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책은 독자들의 폭발적 반응을 얻으며 전 세계에 번역됐다. 최근 부산에서 각색되어 뮤지컬로 공연되기도 했는데, 책과 뮤지컬은 성격이 판이하다. 동화와 공연의 장르적 차이에서 발생하는 이질감이 아니다. 이를 보여주는 근거로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시아버지’ 캐릭터를 들 수 있다. 이 인물은 어린이 관객의 극중 몰입과 흥미를 배가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대중적 공연에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연출 요소이겠지만, 문제는 시아버지가 극적 즐거움만 창안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시아버지는 독박 가사노동에 내몰린 여성(엄마)의 탈주와 귀환 과정을 탈정치적으로 재구성하며, 여성의 저항적 ‘급진성’을 순화하는 인물이다. 아빠와 두 아들이 할아버지의 통제 아래 자기반성에 이르는 극의 전개 과정은 휴머니즘적 감상주의를 넘어서지 못한다. 시아버지라는 상징 규범은 여성(엄마)이 탈주의 상상력을 통해 가부장제의 불합리한 시스템을 정지시키는 변혁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돼지책’의 메시지를 각색하고 표백한다. 시아버지로 표상되는 기득권의 상징체계는 조력자의 형상으로 느닷없이 출몰하지만, 사실은 여성의 일상적 식민 상태를 존속시키는 시혜적이고 타협적인 통치 장치인 셈이다. 

이런 식의 텍스트 각색과 연출 방식은 원문에 대한 심각한 오독일 뿐 아니라, 그림동화의 효용적 기능도 뒤틀어 버리는 일이다. 아마도 뮤지컬의 연출진은 가족의 갈등과 해체를 표면화하는 작품 내용이 어린이 공연 텍스트로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오히려 그것이 아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부장주의의 모순과 적폐를 은폐하는 것이라면 정말 괜찮은 일일까. 동화적 상상력은 우리 사회의 어긋난 인습과 도덕률을 학습하고 주입하는 ‘순응적 동심주의’와는 무관하다. 

요즘 바쁘다는 핑계로 딸과 함께 책 읽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혼자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대견한 일이지만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학생들에게 ‘문학의 이해’보다 ‘문학적인 삶’을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렵다. 오늘 저녁에는 만사 제쳐두고 딸아이와 함께 각색되지 않은 ‘돼지책’을 다시 읽어야겠다.

부산외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많이 본 뉴스RSS

  1. 1[스포츠 에세이] 체육인재육성재단 다시 복원하라 /송강영
  2. 2청약 미달될까…지역 건설사 분양가 산정 골머리
  3. 3고래는 땀을 흘릴까 잠은 또 어떻게 잘까…궁금하면 달려오세요
  4. 4“이제까지 이런 아귀 맛은 없었다” 휴업 불사! 살아 있는 활아귀 고집
  5. 5[다이제스트] 영화 ‘명당’의 배경, 죽도로 떠나요 外
  6. 6근교산&그너머 <1113> 온천산행(1) 창녕 덕암산과 부곡온천
  7. 7[조황] 통영권 ‘봄의 전령’ 도다리 입질 왕성
  8. 8와이즈유 자동차공학부 재학생 6명 CATIA 취득
  9. 9부산의료원 집단 잠복결핵 ‘양성’…시 “병원 내서 감염 판단 어렵다”
  10. 10내버려 둬야 잘 커요…선인장 키우기 ‘곰손’도 문제없죠
  1. 1“이딴 게 무슨 대통령” 한국당 김준교… 알고보니 ‘짝’ 모태솔로 남자3호
  2. 2채용비리 점검에도 공공기관 채용비리 여전...182건 채용비리 적발, 임직원 288명 수사 및 징계 대상 올라
  3. 3‘짝' 모태솔로 김준교 대통령에 막말… 각계 비판 여론 들끓어
  4. 4김무성, ‘태극기 부대’ 겨냥해 비판 “당이 과격분자들 놀이터 되면 안돼”
  5. 5사하구 구민 초청 구정보고회 성황
  6. 6야당 “문재인판 블랙리스트” 청와대 “합법적 체크리스트”
  7. 7여당 도넘은 ‘김경수 구하기’…야당서 뭇매
  8. 8공공기관 채용비리 182건 적발, 임직원 288명 수사·징계 대상
  9. 9윤영석·조경태 야당 최고위원 입성, 안방서 승기 굳히기
  10. 10남북경협, 북한 비핵화 유도 ‘핵심 카드’ 부상
  1. 1청약 미달될까…지역 건설사 분양가 산정 골머리
  2. 2편의점도 ‘3·1운동 100주년’ 마케팅
  3. 3부산에 창업기업 ‘공유 오피스’ 만든다
  4. 4요가부터 건강강좌까지…미디어 고객잡기 치열
  5. 5BIFC관리단 다양한 지역공헌 사업
  6. 6냉장고 하나 바꿨는데 집 안이 화사…요즘 가전 예술이네
  7. 7장바구니 부담 가볍게…메가마트 균일가 ·1+1 상품전
  8. 8‘관광 활성화’ 부울경 머리 맞대다
  9. 9금융·증시 동향
  10. 10서해 5도 어장 55년 만에 부분 야간조업(일출 전 30분·일몰 후 30분) 허용
  1. 1류지혜·이영호 낙태 논란 정리… 취중발언·미성년자
  2. 2오규석 기장군수 직권남용 유죄 벌금 1000만 원 선고, 군수직은 유지
  3. 3인제정보시스템 마비, 인제대학교 수강신청 때문
  4. 4(전문) 낙태 고백 류지혜의 사과… “술마시고 실수. 이영호와 팬들에 미안하다”
  5. 5‘사이버국가고시센터’ 국가직 공무원 원서접수 시작… 총 643명 모집 직렬은?
  6. 6휴가나온 군인 술값에 흔들린 우정…“술 취해 오해 생겨 싸운 듯”
  7. 7청년수당이란? ‘만 34세 이하 청년에게 매월 50만 원 지급’… 올해부터 시행
  8. 8영광여고생 성폭행 사망사건 “소주 3병… 촬영 당시에도 살아있었다”
  9. 9“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패션에 매진했다” 칼 라거펠트 별세
  10. 10고교생 아들 폭행으로 장파열 “가해학생 부모 태도에 분노”
  1. 1‘주전 공백 큰’ 바이에른 뮌헨 VS 리버풀 예상 라인업은?(챔피언스리그)
  2. 2뮌헨, 리버풀 전 선발 라인업 공개…정우영은?
  3. 33억달러(3300억원) 받고 샌디에고 가는 매니 마차도
  4. 4‘3억 달러’ 한화로는 얼마?… 매니 마차도 하루에 9200만 원 버는 셈
  5. 5챔스리그 리버풀vs뮌헨 무승부… 마르티네즈 평점 7.7
  6. 6샌디에이고行 매니 마차도, FA 3억 달러 시대 열어
  7. 7한국 축구, U-20 월드컵 2번 포트에 배정…25일 본선 조 추첨
  8. 8여자 테니스 1위 오사카 1회전 탈락
  9. 9평소엔 방긋, 경기땐 버럭…양상문의 냉온 조련법
  10. 10마차도 10년 3억 달러 ‘잭팟’…MLB FA 새 역사
부산정치인의 말말말
부산정치인의 말말말-오거돈 부산시장
부산정치인의 말말말
부산정치인의 말말말-박인영 부산시의회 의장
강동수의 세설사설 [전체보기]
새해 개천에서 용이 나려면
1919년 그리고 100년, ‘잡화엄식(雜華嚴飾)’을 꿈꾼다
강동진 칼럼 [전체보기]
농업이 도시로 들어오고 있다
북항은 진정한 부산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
기고 [전체보기]
보행도시, 생태적 지혜와 철학 위에서 구현을 /류경희
미래 수산식품산업을 생각하며 /남택정
기자수첩 [전체보기]
‘교양’을 갖춘 사회를 바란다 /신심범
깨지지 않은 ‘서부산 징크스’ /임동우
김용석 칼럼 [전체보기]
‘반려동물’ 수난 시대
‘스마트’하게 살지 않을 권리
김정현 칼럼 [전체보기]
기꺼이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삶의 존엄, 죽음의 존엄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국악 선입견과 마주하기
제례악에 내포된 음양오행 사상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中企를 위한 금융은 없다? /정유선
김복동을 잊지 말자 /이병욱
도청도설 [전체보기]
수제화 장인
광복동 창선파출소
문태준 칼럼 [전체보기]
자기 표현의 기술
신춘문예 당선 소감을 읽으며
박무성 칼럼 [전체보기]
국민의 눈높이
‘밥 한 공기 300원’의 미래
박상현의 끼니 [전체보기]
포르투갈 리스본의 에그타르트
진화하는 통영 꿀빵
사설 [전체보기]
낙동강 하굿둑 시범 개방 생태계 되살리는 계기 돼야
탄력근로제 합의, 사회적 대화 정착 좋은 선례로 남길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생계급여 수급 노인과 ‘줬다 뺏는 기초연금’
출산 절벽시대 ‘인구 장관’ 필요하다
이은화의 미술여행 [전체보기]
기절을 부르는 비너스
미술관을 지키는 강아지
이홍 칼럼 [전체보기]
개념도 정리 안 된 ‘4차 산업혁명’
장재건 칼럼 [전체보기]
되살아나는 박근혜의 그림자
보행친화도시로 가는 길
조영석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봄이 오는 길목에서
발랄라이카와 닥터 지바고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내추럴와인과 정월 대보름
프랑스와 미국의 와인전쟁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
  • 복간30주년기념음악회
  • 어린이극지해양아카데미
  • 유콘서트
경남교육청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해맑은 상상 밀양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