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난 식당에서는 보통 제일 중요한 칼을 ‘왕칼’이라고 한다. 국제신문은 칼 가운데서도 왕칼이었다. 내가 국제신문을 읽기 시작했던 1950년대 고등학교 학생시절에는 그랬다.

그때는 국제신문 석간 토요일 맨 뒤 페이지에 ‘학생문단’난이 있었다. 그 난은 문학도에게 가능성의 씨를 뿌리게 해주는 텃밭이었다. 대부분의 고등학생이 인문사회계를 지원하던 시절, 문학도에게 그 난은 인기가 대단했다. 문학도인 나도 일주일 내내 토요일의 국제신문을 기다렸다. 나에게는 그 면이 칼로 치자면 왕칼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은 국제신문에 ‘학생문단’난이 없다. 스마트폰에 그 자리를 뺏긴 때문이다. 인문학에 대한 세상의 태도가 변한 탓도 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4·19를 촉발했던 주범인 당시 내무부 장관 장경근이 구속돼 병원에 입원 중 도망쳤다. 모든 수사기관, 언론이 그의 행방을 뒤졌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런 그가 일본으로 도망치기 전 잠깐 화장실에 들렀다. 그 장면이 국제신문 기자가 펼쳐 놓은 취재망에 걸렸다. 전국의 모든 언론을 허탈하게 만든 국제신문의 대특종이었다.

위의 두 사례는 한갓 예에 불과하다. 임시 수도 부산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당시의 국제신문은 일기당천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치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심장박동기로 회생한 일도 있었다. 그 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세상도 많이 변했다. 그런 가운데 지령 2만 호를 맞게 되었다. 종이신문의 환경이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지령 2만 호를 맞다니,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입에만 붙은 ‘축하’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종이신문이 어렵기는 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60년 전부터 국제신문을 읽어 온 독자로서 이 귀한 자리에서 ‘축하’라는 말을 진정성 있게 하기 위해서는 고언을 섞지 않아서는 안 될 것 같다.

국제신문은 언제부턴가 칼날이 무뎌졌다. 지령 2만 호를 기념하고 자축하기 위해서는 구성원 모두가 무뎌진 칼날을 다시 세우겠다는 결의가 앞서야 하겠다. 그 결의가 빠진 ‘축하’는 해서도 안 되고 받아서도 안 된다. 허울뿐인 축하는 아픈 자성의 탑 위에다 올려놓아야 한다.

언젠가부터 언론인은 무딘 칼로 구덩이 살 같은 세상을 요리하겠다고 덤비고 있다. 라만차의 돈키호테 코스프레를 하다가 봉급자로 전락해버린다. 그리고는 안분지족의 타성에 젖는다. 안분지족. 그렇다. 기자에게 안분지족은 정치인의 부패에 뒤지지 않는 무서운 함정이다. 타성에 빠져 자기멸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축하 행사에는 구성원 모두가 날을 새롭게 세우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파이팅’을 외치며 문화를, 정치를, 경제를, 사회를, 국제관계를, 그리고 미래를 향한 개안수술을 해야 한다. 수많은 직업 가운데 기자를 택한 사람이 해야 될 일이 봉급생활자로서 안분지족하는 일이어서야 되겠는가. 새로운 결의로 맞는 2만 호라야만 참된 자축의 기념호가 될 것이다.

천 년 신라가 왜 망했는가. 치열했던 화랑정신이 없어진 탓이었다. 사치와 향락으로 취해 있던 신라 도성 서라벌은 금입택(金入宅)으로 타락했다. 정사를 제쳐 둔 국가 최고 지도자가 포석정에서 즐겼던 음주가무. 어떻게 백제 견훤의 칼날이 그런 사치를 비켜갈 수 있겠는가. 화랑세기는 오늘 우리에게 역사가 얼마나 아픈 것인가를 말하고 있지 않는가.

기자는 사관(史官)이다. 한무제(漢武帝)의 궁형에도 굴하지 않고 사기(史記)를 완성한 사마천이야 될 수 없겠지만, 역사를 직시하는, 그리고 올곧게 기술하는 기자는 현대판 사관이어야 한다.

공룡은 경계도 없는 지구를 지배했다. 온라인의 세계에는 국가 개념이 없다. 그렇지만 소통의 고속도로를 뚫어 번영을 구가하는 지름길을 만들었다. 국경에 묶이고, 지방에 위축되며, 남북에다 선을 그어 놓고 있는 나라의 국제신문의 좌표는 어디에 있는가.

국제신문은 국경 없는 시대를 힘차게 이끌어야 한다. 지방주의에 위축된 시골신문의 초라한 외투를 과감하게 벗어야 한다. 더 크고 더 중요한 세계적 사건을 제치고 부산의 골목뉴스만 톱으로 올리는 것은 지방주의의 맹목적 집착이다. 불필요한 타성이다. 변화를 따를 것이 아니라 변화를 만들어 가는 신문, 타다가 만 장작그루터기가 아니라 재가 될 때까지 타는 국제신문. 그리고 그 신문의 기자. 도려낼 것을 과감히 도려내 요리할 것을 맛있게 요리하겠다는 국제신문의 각오가 있을 때 지령 2만 호는 비로소 칼 가운데 왕칼이며 모두가 우러러보는 눈부신 횃불이 될 것이다.

전 부경대 총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