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0년간 한반도를 옭아맨 냉전의 족쇄가 강고하긴 해도 벗어날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1972년 남북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발표했던 ‘7·4 공동성명’이 그 하나다.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통일은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이 아니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한다.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넘어서 하나의 민족으로서 단결해야 한다.”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원칙을 표방한 성명 내용은 자못 파격적이고 혁신적이었다. 그때는 물론 지금에 비추어서도 그렇다.

하지만 당시 남북 정권은 성명을 거스르는 모순된 행태로 천금 같은 탈냉전 기회를 놓쳐버렸다. 남한은 성명 발표 후 돌연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심복기구를 신설해 체육관에서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고는 영구집권을 꾀했다. 북한도 그해 12월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고 주체사상에 입각한 수령유일체제를 확립해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어 나갔다.

7·4 공동성명이 나온 배경에는 동서 데탕트(긴장 완화)가 있다. 1969년 7월, 닉슨 미국 대통령이 냉전체제를 청산하자며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 데 이어 1972년 2월에 중국을 방문해 양국의 적대관계 종료를 공식화하는 ‘상해 공동성명’을 내놓았다. 이런 세계정세 변화는 남북 정권에 심각한 존립 불안으로 다가왔다. 이른바 ‘데탕트 위기론’이다. 그 대책으로 도모했던 게 7·4 공동성명이다. 밖으론 평화공존을 표방했지만, 기실 안으로는 더 높고 두꺼운 방벽을 쳤다. 서로를 향해 이념의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웠고, 군사적 긴장은 고조되어 갔다.

남북은 그를 통해 정권 연장과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적을 자신의 존재근거로 삼는 ‘적대적 공존’이다. 남한 사회에는 국민을 ‘빨갱이-비(非) 빨갱이’ 두 부류로 나누는 흑백논리가 팽배했다. 반북(反北)은 보수의 지상 최고가치로 뿌리내렸다. 그 가치는 1989년 미국과 소련 정상이 몰타에서 동서 냉전 종식을 선언하고, 1990년과 1992년 남한이 소련·중국과 잇따라 수교를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적대적 공존이 냉전 사고로 굳어진 것이다.

보수는 선거 때마다 ‘친북(親北)=빨갱이’ 논리를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둘렀고, ‘종북(從北)몰이’는 남한판 매카시즘으로 자리 잡았다. 냉전 사고가 보수의 정치적 유전자에 각인된 셈이다. 1997년 대선 직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측 인사들이 지지율 상승을 위해 북측에 무력시위를 요청한 ‘총풍(銃風) 사건’에서 보수는 적대적 공존의식의 극단을 드러냈다. 친북과 반북, 빨갱이와 비빨갱이의 이분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가치의 다양성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다른 가치와 생각을 얘기하는 이는 빨갱이로 몰리기 일쑤였다.

북한이 내세우는 가치를 인정한 다음 그 위에서 성과를 비판·경험적으로 검증해 보자는 ‘내재적 접근론’을 제시한 재독 철학자 송두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처지를 바꿔 생각해봐야 상대방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생활 진리와 같은 개념인데, 이런 상식적인 주장조차 이적행위로 몰려 송두율은 옥살이를 해야 했다. 사람의 키에 침대를 맞추는 게 아니라 침대 길이에 맞춰 사람의 발을 자르는, 그리스 신화의 ‘프루크루테스 침대’ 같은 사회였다.

다행히 지난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발표한 ‘판문점 선언’으로 남북은 냉전의 벽을 허물 호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보수의 냉전 사고는 여전해 탈냉전의 장애물이 될 것으로 우려된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판문점 선언을 “위장평화쇼”라고 폄훼했다. 1, 2차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힘겹게 일군 평화공존 성과를 내팽개친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의 후신인 한국당이 ‘민족의 밥상’에 또 재를 뿌린 것이다.

보수는 지난 20일 남북 정상회담에 딴지를 거는 총궐기에 나서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한 보수논객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경고한다.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난도질하는 행위를 중단하지 않으면 그가 나중에 시체가 되어 현충원에 묻히고자 할 때 16만의 영혼이 전부 일어나서 막을 것”이라는 막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박근혜 탄핵 후 제기됐던 보수 진영의 개혁 다짐은 실종된 지 오래다.

극우 신보수주의자인 트럼프 대통령마저 남북의 종전(終戰) 행보를 지지하며 북미 정상회담 개최를 서두르는 마당에 시대착오도 이런 시대착오가 없다. 전근대적 환상에 갇혀 사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가치의 자유와 다양성을 생명으로 여기는 4차 산업혁명시대를 운운하니, 홍 대표가 여당 비판용으로 언급한 ‘개그콘서트’나 다름없다. 다수 국민이 그런 보수에게서 적대적 공존 시대의 음험한 권력욕만 물씬 느낄 뿐이라는 걸 보수만 모르는 모양이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