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 작가 윌리엄 골딩의 대표작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은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이다. 핵전쟁을 피해 피란 가던 소년들이 비행기 추락으로 무인도에 표착해 살면서 서로 죽고 죽이는 야만인으로 변질돼 간다는 줄거리다. 파리대왕은 로버트 밸런타인이 1858년에 쓴 소설 ‘산호섬’을 비판적으로 패러디했다. 난파당해 무인도로 흘러든 세 소년이 협력해 모험 끝에 귀가한다는 내용의 ‘산호섬’이 빅토리아시대의 낙관론을 대변한다면, ‘파리대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대의 비관론을 담았다.
파리대왕이란 제목은 성경에서 따왔다. 파리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제붑’이다. 팔레스타인의 고대 블레셋 주민들은 파리의 피해를 막기 위해 ‘바알제붑’이란 신을 만들어 숭배했다. 이른바 ‘파리 신’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파리는 병과 죽음의 신인 ‘네르갈’을 상징했다. 파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이처럼 뿌리가 깊다.
드물긴 하지만 이와 다른 시각도 있다. 1980년 헝가리의 페렌츠 로푸스 감독이 만들어 이듬해 아카데미상을 받은 단편 애니메이션 ‘파리’다. 영화에서 파리는 우연히 빛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온 뒤 사람이 휘두르는 파리채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닌다. 사람은 전체주의로 변한 공산주의 체제를, 파리는 그 체제를 비판하는 반정부 인사를 의미한다. 창문을 열어 파리를 내쫓지 않고 죽여서 표본으로 삼는 데서 자유를 압살하는 체제의 독재성이 도드라진다.
지방선거 정국의 최대 현안으로 불거진 ‘포털 댓글 조작 사건’에서도 파리가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자유한국당이 국정원 댓글 조작과 (포털 댓글 사건의 주범인) 드루킹의 댓글 장난을 동일시하는 것은 파리 보고 새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했다. 그러자 홍준표 한국당 대표가 “그러면 파리(드루킹)를 수사하는 검찰과 경찰은 (파리 잡는 접착 도구인) 찍찍이인가”라고 반박했다. 그는 또 “문재인 대통령은 파리의 도움으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거냐”면서 문 대통령을 ‘파리대왕’에 비유했다.
특검 도입을 압박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라는 건 이해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다. 주목해야 할 사안은 댓글 조작으로 여론을 왜곡할 수 있는 포털의 파행상이다. 이를 도외시한 채 사건을 정략적으로만 이용하려 든다면 정치는 홍 대표의 말처럼 ‘개그 콘서트’로 전락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