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국회 선거를 1주일 앞둔 1933년 2월 27일 밤, 의사당에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했다. 범인을 붙잡아 조사한 경찰이 한 미치광이의 소행이라고 밝혔으나,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당은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로 몰아갔다. 이를 통해 여론을 오도한 나치당은 공산당원과 사회민주당원, 노동조합 간부 등 2만5000여 명이 체포된 가운데 치른 선거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해 독제체제를 구축했다. 현대 조작정치의 표본으로 꼽히는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다.

1980년 신군부가 일으킨 ‘김대중(DJ) 내란음모 사건’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조작정치 사례다. DJ를 위시한 민주 세력은 광주민중항쟁의 배후로 몰려 군사재판에 회부된 뒤 중형을 선고받고 정치 무대에서 쫓겨나 1987년 6월 항쟁 전까지 유배자 신세를 전전해야 했다. 1997년 대선 직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측 인사들이 지지율을 높이려고 북한에 휴전선에서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한 ‘총풍 사건’ 역시 미수에 그쳤지만 그런 사례에 속한다.

집권 세력이 정보를 독점했던 아날로그시대에는 우리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조작정치가 횡행했다. 인터넷과 SNS를 통해 누구나 실시간으로 정보를 생산·공유할 수 있는 디지털시대에는 이런 폐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 그 기대는 한층 진화한 조작의 난관에 부딪혔다. 2012년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이 자행한 댓글 사건이나 최근 불거진 더불어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은 디지털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키운다. 이슬람교도와 불교도가 서로 공격할 것이라는 거짓 뉴스가 페이스북에 마구 유포돼 미얀마 정부군의 로힝야족 ‘인종 청소’를 부추긴 사건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인터넷과 SNS의 네트워크를 벗어날 수 없는 디지털 사회의 현실이다. 조작을 막는 기술이 개발되더라도 곧 그것을 뛰어넘는 조작 기술이 나타나리라는 것을 알면서 소외되지 않으려면 디지털 네트워크에 머물러야 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싫든 좋든 관계를 유지하려고 페이스북의 ‘좋아요’를 누르는 현대인을 통해 그런 운명을 단적으로 묘사했다. 보다 큰 성과를 위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과잉 긍정’이 낳은 현상이란다. 그렇게 굴러가는 사회를 그는 “자기 착취의 피로사회”라고 규정했다.

피로 요인이 하나 더 늘었다. 네트워크 조작의 불안과 그로 말미암은 소통에 대한 불신이다. ‘조작 피로사회’라 할 만하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