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정확히 80년 전 오늘로 돌려보자. 1938년 3월 12일. 그날은 ‘안슐루스(Anschluss)’가 시작된 날이다. 안슐루스는 독일어로 ‘병합’을 가리키는데, 역사용어로는 ‘나치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 병합’을 의미한다. 아돌프 히틀러가 세계 정복의 야망 실현을 위해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오스트리아를 식민지화한 사건이다.

당시 히틀러는 수년간 오스트리아 내 나치 앞잡이들을 배후 조종해 ‘독일 병합론’을 주창토록 했다. 그러나 쿠르트 슈슈니크 총리 등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한다. 히틀러는 결국 오스트리아 침공을 결심하고 1938년 3월 12일 진군 명령을 내린다. 군사력이 약한 오스트리아는 나치의 총과 대포 아래에서 명목뿐인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독일 병합안’은 99% 이상 찬성률로 통과했다. 합법을 가장했지만 무력을 앞세운 불법 찬탈이다.

우리 역사에도 유사한 사건이 있다. 그보다 28년 전 발생한, 불법적 대한제국 찬탈이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서울 뿐 아니라 전국에 무장병력을 배치한다. 그리고 미리 매수한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 등을 앞세워 형식적 내각회의를 열고 이른바 ‘한일병합’ 안건을 결의케 한다. 이어서 일본 통감 데라우치와 이완용의 이름으로 ‘한일병합조약’을 조인한다. 이후 36년간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두 사건은 닮은꼴이다. 전개 방식이 흡사하고, 가해 국가가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다. 안슐루스 당시 독일과 일본은 동맹국이기도 했다. 히틀러가 일본의 식민지화 비법을 배운 것으로 보는 이유다. 그런데 독일과 일본, 그리고 대한민국의 운명은 1945년 세계대전 종전 후 극명하게 달라진다. ‘전쟁 정산’ 과정에서 2개의 분단국이 탄생하는데, 독일과 대한민국이다. 전범국가 책임론으로 보면 독일과 일본이 쪼개져야 했겠지만, 일본 대신 죄 없는 대한민국이 피해를 입는다. 그로부터 시작된 한반도 남북분단의 상처는 지금까지도 아물지 않고 있다. 일본은 비록 침략의 대가로 원자탄을 맞았지만, 미국에게 큰 빚을 진 셈이다.

최근 ‘한반도 해빙 무드’에 대처하는 아베 신조 총리의 행보를 보면서 그에게 이 역사적 사건들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의 시선이 ‘삐딱한 것 같은’ 의심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의 삐딱한 시선 밑바탕에는 ‘두 개의 착각’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아직도 한반도를 식민지로 여기는가’하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9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올림픽 후 한미연합군사훈련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가 면박을 당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 주권 문제이자 내정 문제이므로 총리가 언급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일축했다. 통감정치가 자행되던 1910년 즈음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두 번째는 ‘과장된 피해자 심리’가 보인다는 점이다. 올림픽 전후는 물론이고 ‘대북 대미 특사단’의 잇단 중요 발표 때마다 아베 총리는 미지근한 반응으로 일관했다. 지난 9일 북미 정상회담 5월 개최 발표 후에는 스스로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 통화한 사실을 밝히며 “4월에 미국을 방문해 미일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요구사항을 전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중국 당국자까지도 내놓은 “일단 환영”과 같은 반응은 찾을 수 없다. 피해자 심리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착각 아니면 기우라고 할 만하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 실험 과정에서 ‘미국 타격’은 언급했을지언정 일본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아베 총리는 잠재적 피해자로서의 일본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오늘날의 남북 분단을 야기한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가해자가 일본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 같다.

아베 총리를 보면서 일본어 단어 하나가 떠오른다. 최근 자유한국당 이은재 의원이 썼다가 ‘일제 잔재’로 비판받았던 ‘겐세이’라는 말이다. ‘겐세이(けんせい)’는 ‘견제(牽制)’를 일본식 한자음으로 읽은 말이다. 일상 대화 중 제삼자가 참견하듯 끼어들 때 사용한다. 상황에 따라 ‘훼방 놓다’ ‘가로막다’ ‘견제하다’ 등으로 해석된다. 말인즉, 모처럼 조성된 한반도 대화 분위기에서 ‘아베의 겐세이’가 우려된다는 말이다. 일본은 제삼자이니 빠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한미일 동맹을 강조하는 동북아의 대국이자 이웃 우방국의 리더답게 상대방을 좀 더 위해주는 통 큰 면모를 보이라는 이야기다.

우리 국민 사이에는 아베 총리가 집권 6년간 정치적 곤경에 처할 때마다 북한 핵과 미사일 실험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는 인식이 없지 않다는 것도 알 필요가 있다. 일본은 미국에 큰 빚을 졌지만, 아베 총리 역시 김정은 위원장에게 정치적 빚을 진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좀 더 솔직해지자.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