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배신감을 느낀 적이 또 있었을까. 대중 앞에서 늘 웃음 띠던 얼굴과 온화했던 모습. 지금 이 순간에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런데 그게 ‘가면’이었다니. 차기에 기회가 생기면 꼭 한 표를 던지리라 마음 먹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 대한 호감도 또한 높았음을 기억한다. 그렇기에 충격도 이런 충격이 없다.
정치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대망을 꿈꿀 순 없다.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차곡차곡 탑을 쌓아 올리던 그였기에 처음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일하에 드러난 이중성. 낮 다르고 밤 달랐던 사생활. 참신하고 깨끗한 이미지는 허상이었다. 허접스러운 권력형 성폭력 가해자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과 함께 분노가 치민다. 수행비서뿐 아니라 그의 싱크탱크 여직원도 똑같은 피해를 입었다고 폭로했다. 집요하고도 계산된 ‘상습 성폭행’ 아닌가.
지난 대선 당 경선 때 그의 부인이 토크쇼에서 했던 말이 기억 난다. ‘이 사람은 왕자병 기질이 좀 있다. 어쩌다 선을 넘는 경우도 있는데 혹 선을 넘으면 여러분이 안으로 다시 밀어 넣어 함께 갔으면 좋겠다’. 그땐 웃어 넘겼지만 지금 와서 다시 곱씹어 보게 된다. 자기 제어 불능이 숨겨진 본성이라면 일찍이 잘 들통난 셈이다. 가려진 채 계속 갔더라면 더욱 참담한 일이 벌어질 뻔했다.
유력 잠룡에서 성폭행 피의자로 전락한 안희정. 그가 던진 충격파는 정치인의 도덕성에 경종을 울림과 아울러 권력형 성범죄 근절을 재촉하는 기폭제가 됐다는 점에서 여타 분야와는 급이 다르다. 정·관계 등 현실 권력의 본산으로까지 파장이 미치는 것은 시간문제다. 벌써 국회 게시판에는 ‘×××의원님 안녕하세요. 저는 잘 지내지 못합니다’ ‘×××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나요’ ‘의원 사무실도 연극판과 마찬가지’라는 등의 의혹 글이 꼬리를 물고 있다. 권위주의가 팽배한 정치권은 성범죄 소문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곪아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다.
안희정 사태는 개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인면수심 남성 몇몇의 예외적 일탈이 아닌 것이다. 위계에 의한 저급한 성폭력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거듭 일깨운다.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사각지대가 많을 것이다. 미투가 제기하는 것은 단순 성폭력 문제가 아니라 우월한 지위, 특권의식이 낳은 범죄의 고발이다. 진지한 자세로 거대한 사회 변혁의 계기로 삼아야 하고, 그 조치로 양성평등을 실현할 법적·제도적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
그럼에도 정치권, 특히 보수진영이 보이고 있는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식의 공세는 한심스럽다. 그저께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의 청와대 오찬 자리에서 나온 발언은 혀를 차게 한다. 당 대표라는 사람들이 미투를 잡담 수준으로 만들어 버렸다. ‘좌파들이 더 많이 걸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홍준표 대표는 “안희정을 임종석이 기획했다고 하던데”라며 시중에 떠도는 루머로 기획설을 제기했다. 당 대표라는 여성들 발언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남성들이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별로 없을걸”(추미애) “지금 발 뻗고 잘 수 있는 것은 여자들이다”(조배숙). 이게 무슨 가당찮은 말인가. 남성은 모두 잠재적 성범죄자라는 것인가. 정치 지도자들이 미투 피해자들의 처지는 고려하지 않고 농지거리나 해댔으니.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의 발언은 더 가관이다. “미투를 사회적인 시련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된 운동권 문화를 자기 고백하고 성찰하는 계기로 삼길 바란다”며 진보진영을 공격했다. 안희정 성폭행 폭로를 ‘좌파 운동권의 그릇된 성(性)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 게다. 미투 동참 여성을 모독하는 개념 없는 ‘싼 입’이 위태롭기 그지없다. 미투의 도도한 물결에 휩쓸리지 않을 자신이 그렇게도 있는가. 부메랑을 자초할지 모를 일이다. 안희정에 이어 서울시장에 출마하려던 정봉주도 성추행 의혹에 휘말렸다. 이제 미투는 불가역적 단계에 접어들었다. 온갖 차별과 폭력을 낳아온 남성 기득권에 대한 각성과 더불어 낡은 문화 및 관행을 뜯어고치는 작업이 우리 사회 전반으로 번져야 한다.
안희정 사태는 어떤 식으로든 지방권력을 선출하는 6월 지방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전선 확대로 어느 정파가 득을 볼지는 알 수 없으나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이전 선거 이상의 엄격한 후보자 검증이다. ‘도덕성 선거’가 돼야 한다. 미투가 피해 당사자의 용기 있는 폭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미투가 지방선거 후보군으로까지 확대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후보자들도 과거 행적과 주변을 ‘자가 검증’해 문제가 될 성싶으면 스스로 퇴장하는 게 옳다. 정치와 사회를 더는 오염시키지 말아야 한다.
대기자 by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