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지났다. 예전에는 ‘구정(舊正)’ ‘음력설’ 혹은 잠깐 ‘민속의 날’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역시 ‘설날’이 가장 정겹게 와 닿는다. 점점 음력을 사용하지 않는 시대지만 필자는 아직 음력 생일날에 미역국을 먹고,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는 느낌 역시 설날에서야 비로소 체감한다. 굳이 따지자면 지구의 공전주기를 달이 차고 기우는 태음력으로 분석한 1년 중 하루에 불과하다.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으로 나눈 365일 중 하루이고, 이슬람력으로 나눈 354일 중 하루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하루에 수많은 기원과 간절한 소망을 담는다.
미국에서 연수할 시절, 음력을 사용하지 않는 공간과 사람들 사이에서는 설날이 너무나 평범한 하루가 되어버렸다. 당연하지만 무척이나 낯선 경험이었다. 이렇듯 설날이 소중한 것은 우리가 그 하루에 ‘처음’이라는 큰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흡사 어린 왕자에게 유일한 의미가 되어버린 ‘장미’나 이름을 불러 의미를 부여한 어떤 시인의 ‘꽃’처럼 말이다.

우리는 더없이 약하고 불안한 존재다. ‘팡세’에 나오는 파스칼의 유명한 구절처럼 ‘인간은 한 줄기 갈대에 지나지 않으며, 자연 가운데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이다’. 하늘하늘한 미풍에도, 한줄기 빗방울에도 여지없이 흔들리는 갈대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실패와 좌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날, 새로운 시간에 다시 ‘처음’이라는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이미 경험한 아픔을 과거로 돌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리셋 포인트를 계속 만들어 우리의 나약함을 극복해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부여한 ‘처음’은 이렇게 크나큰 발전과 치유를 가능하게 만든다.

필자는 심장 수술을 하는 흉부외과 의사다. 최초의 의사는 누굴까? 의사 동료들끼리 하는 농담으로 최초의 흉부외과 의사는 바로 하느님이다. 아담의 갈비뼈를 빼내어(늑골절제술) 이브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듣고 있던 마취과 선생은 최초의 마취과 의사도 역시 하느님이란다. 늑골을 빼내기 전에 아담을 잠든 상태로 만들었다나? 아무튼 필자는 1998년, 첫 심장 수술을 집도하던 날의 그 날선 긴장감을 아직 기억한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심장 수술이 있는 아침이면 저절로 눈이 일찍 떠지고 흡사 그때처럼 긴장한다. 수없이 반복했던 수술임에도 매번 환자의 상태가 다르고, 동반된 환자의 질병이 다르니 같은 수술임에도 매번 새롭다. 장시간의 수술시간 동안 혹시라도 생리현상으로 낭패를 볼까 물도 제한하고, 좋아하는 커피도 잠시 금한다. 수술이 끝나면 마치 길고 힘든 연주 후 팽팽하게 당겨졌던 현악기 줄을 풀어 내려놓는 느낌이다.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과 감사한 마음이 그 순간에 찾아온다. 20년 전에 처음으로 느꼈던 감정이고, 또한 아직도 느끼고 있는 내 삶의 원동력이다.

‘늘 다시 시작하는 첫 마음의 기쁨’. 이유 없는 반항심과 정체 모를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넘쳐나던 사춘기, 필자의 첫사랑이셨던 클라우디아 이해인 수녀님께서 최근 적어주신 글귀이다. 흔들리는 나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리셨는지, 평범하지만 곱씹을수록 글귀에서 우러나오는 의미가 새롭고 달콤하다. 졸업과 입학을 앞둔 많은 이에게 새로운 힘찬 출발을 다짐하는 시간이고, 또한 좌절과 아픔을 경험한 많은 이에게는 첫 기억, 첫 결심을 소중하게 반추(反芻)할 수 있는 시간이다. 작년 한 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첫 역사를 경험한 우리에게 다시 필요한 화두(話頭)이기도 하다.

자, 다시 시작해보자. 새로운 ‘처음’을 다짐하는 매일, 매 순간이 새로운 ‘설날’이다.

부산백병원 흉부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