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한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자살을 감행했다. 2017년 11월 12일 새벽, 서울 목동의 열병합발전소에서 두 노동자가 “고용, 노동조합 및 단체협약 보장 약속을 이행하라”며 75ｍ 상공의 굴뚝에 올랐다. 한 달 보름 뒤 12월 27일, 6·10민주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이 개봉했다. 화마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은 노동자는 전태일이고, 75ｍ 굴뚝 상공의 한파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은 노동자는 파인텍지회의 박준호, 홍기탁이다. 그리고 영화 ‘1987’에 환호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이름하여 ‘촛불시민’이다.
영화 ‘1987’이 6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온 586세대 중에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도 그때 거기 있었다며 은근슬쩍 자부심을 드러내는 사람도 여럿 보인다. 한편 청년 중에는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내놓거나 지금 누리는 민주주의가 1987년의 희생 위에서 성립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며 감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586이든, 청년들이든 이렇게 ‘1987’에 우호적인 심사를 내비치는 사람들은 대개 지난 촛불정국에서 거리에 나선 사람들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1987년 군부독재정권에 반대했거나 2017년 박근혜 정권에 반대했다는 사실, 독재와 부패와 기득권의 전횡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1987’이 어떤 식으로 소환됐든 간에 30년 전의 역사가 지금 여기의 현실을 규정하는 어떤 준거나 틀로써 작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여기서 영화의 완성도나 영화의 역사적 정당성 따위를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제비족이 그 현란한 말솜씨와 반지르르한 외양 뒤에 다른 목적을 숨기고 있듯이, 쌍꺼풀에 오뚝한 코와 날렵한 턱선의 미인이 그 얼굴 뒤에 칼자국과 실리콘과 깎은 뼈를 숨기고 있듯이, 모든 도드라진 드러남은 그 도드라짐을 강조하기 위해 무언가를 은폐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려던 1987년의 역사가 드러나면서 작금의 현실에서 은폐되거나 배제된 것은 없는지 살펴보는 일은 1987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영화 ‘1987’의 교훈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의 뒤편에는 고통받고 피를 흘린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고, 폭압적인 권력은 민중(의 힘)이 용서하지 않는다. 고로 희생 위에서 이루어낸 작금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이다. 그러니까 1987은 작금의 민주주의를 작동하게 하는 전제가 되고, 촛불시민, 더 좁게는 촛불시민에 기대 세워진 촛불정권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1987의 정당성 아래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볼 수도 있겠다. 1987년의 대학생들보다 2018년의 대학생은 더 많은 학문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는가? 1987년의 학력고사보다 2018년의 수능 입시제도는 수험생들에게 더 많은 자유와 재능의 다양성을 부여하고 있는가? 1987년의 노동자보다 2018년의 노동자들은 더 많은 권리와 일자리를 보장받고 있는가? 1987년의 재벌보다 2018년의 재벌은 비독점적이고 비세습적으로, 더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는가? 1987년의 핵발전소보다 2018년의 핵발전소는 더 안전하고 투명하게, 더 개방적이고 민주적으로 지역분산적인 에너지 정책에 호응하고 있는가?
1987은 해답이나 정답이 아니라 독재에서 민주로, 수직에서 수평으로, 계급에서 평등으로, 독점에서 공유로 가는 사회에 대한 질문이었고, 비전이었고, 기획이었고, 과정이었다. 1987은 아직 진행 중인 사건이지 완결된 역사가 아닌 것이다. 1987에 수백만이 열광하는 지금, 노동자가 75m 굴뚝 상공에서 67일째 추위와 외로움에 떨고 있다. 수험생과 청년들은 입시와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날마다 떨고 있다. ‘1987’이 드러낸 것을 무조건 폄훼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1987’이 드러내지 않은 것을 외면하지 말자는 거다. 은폐되고 배제되고 소외된 것을 호명하는 일은 그 어떤 체제와 사회에서도 멈춰서는 안 되는 인간 본연의 일, 그것이 바로 ‘1987’이 말하는 민주주의기 때문이다.
작가·헤세이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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