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항만경제계의 한 지인이 영화 ‘남한산성’을 감명 깊게 본 모양이다. 짤막한 카톡 글을 기자한테 보내 왔는데 눈에 띄는 한 줄이 있었다. ‘부산항도 남한산성에 갇힌 꼴’이라는 것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처음엔 뜬금없다 여겼으나 곱씹어보니 의미심장하게 와 닿았다.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고자 하는 중국, 그에 반해 비전도 의지도 약한 대한민국과 부산항. 병자호란 때나 글로벌 해운·항만·물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이나 대책 없이 무기력하니 산성에 갇혔다고 표현한 게다.
지금 중국이 펴고 있는 해양·조선 정책은 놀랍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하다. 전 세계적으로 막강한 힘을 과시하겠다는 ‘대국굴기’가 바다에서도 넓고 깊게 전개되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야심이 예사롭지 않음은 올해 초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가 내보낸 ‘해양 슈퍼파워 중국’ 특집기사에서 잘 드러난다.
중국의 해양굴기 전략 요지는 세계 주요 항구 장악과 해상 실크로드 가속화다. 이를 통해 해양 초대국을 만든다는 구상인 것이다. 2010년부터 중국계 자본 53조 원을 해외에 쏟아붓는 등 치밀하고 장대한 계획은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 2015년 기준 세계 50대 컨테이너 항구 세 곳 중 두 곳을 장악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중국 자금이 들어간 항만에서 처리되는 컨테이너 물동량이 지구촌 전체 컨 물량의 67%에 육박한다는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컨테이너 항만만 놓고 본다면 중국은 이미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고 있다는 평가가 옳다.
이런 조치가 단순히 중국이 세계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동량이 적어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항구는 투자 타깃이다. 파키스탄의 항만도시 과다르가 좋은 예다. 이 도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인 끝에 중국은 항구 건설과 운영권을 따냈다. 2015년엔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아예 이 항구를 2059년까지 대여 받았다. 애초 상업적 목적으로 접근한 중국은 아라비아해로 진입하는 요충지에 자국 해군까지 드나들 수 있는 권리마저 확보한 게다. 경제협력을 내세워 전략적 무역지를 만든 뒤 장차 군사적으로 이용하는 과다르 방식은 동아프리카의 해운 요충지 지부티에서도 적용됐다. 고대 무역 루트인 실크로드를 부활시켜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유럽의 상업을 부양하겠다는 시진핑의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 구상의 궁극적 목적은 해양에서의 영향력 확대다.
지금 중국은 15세기 말 스페인을 연상시킨다. 당시 스페인 이사벨 여왕은 생존을 위해 이탈리아 출신의 콜럼버스를 믿고 왕관까지 팔아 지원하면서 신대륙을 발견하고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모두가 부정하던 때 그녀는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확신과 혜안을 가졌던 것이다. 배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항로를 개척하고 탐험과 무역을 하는 것이 국부창출의 핵심으로 본 네덜란드는 또 어떤가. 일찍부터 가볍고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는 반값의 선박을 만들기 위해 외국 선박설계·조선기술자 등의 영주권제도를 도입하고, 선주들에게 면세 혜택을 줘 유럽 화물을 독점했다. 로테르담이 유럽 1위 항만의 지위를 줄곧 유지하고 있는 뿌리다.
19세기 미 해군제독 출신이자 군사 전략가인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해양교역과 해군의 우위에 의해 바다를 지배하는 것은 세계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육상의 재산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교역을 바다만큼 촉진하는 것은 없다’. 여기에 충실히 따르는 나라가 지금 중국이다.
그럴진대 우리는 어떤가. 경제력에 걸맞게 해운산업을 키워도 모자랄 판에 세계 7위 컨테이너 선사인 한진해운을 파산시켰다. 해운업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과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이훈 의원이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주요 공기업으로부터 제출받은 국감 자료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 실패로 지난 10년간 13조9000억 원에 달하는 손해를 봤다고 한다. 차라리 그 돈을 중국처럼 해양영토 확장에 투자했더라면 오늘날 자원외교가 청산할 적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바다는 선점하는 자의 것’이라 교훈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언제까지 우리는 세계사를 더듬으면서 배우자고 구호만 외칠 것인가.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도 ‘해운·조선 상생을 통한 해운강국 건설’이 들어 있다.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되풀이되는 수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싱가포르를 벤치마킹조차 못 하면서 부산항을 동북아 해양수도로 육성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부산항이 산성에 갇혔다는 것은 대한민국 조선·해운·물류·항만서비스 산업 또한 그렇다는 말이다. 최명길이든 김상헌이든 남한산성에 들어앉은 부산항을 구할 현인은 과연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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