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SK이노베이션 노사가 자율합의한 획기적인 임·단협안을 접하면서 문득 한 기업이 떠올랐다. 팀 하스(Tim Haahs). 세계적인 건축설계 회사다. 마천루와 같은 과시적인 건물을 설계하는 곳이 아니라 주차빌딩 한 우물만 파는 특이한 기업이다. 팀 하스 설립자 하형록 회장은 미국 주차빌딩계의 혁신가로 불린다. 일개 주차장이 사람을 섬기고 공동체 발전을 이끈다고 하면 선뜻 이해가 될는지. 고객을 짐짝 취급하는 우리네 주차빌딩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으로 블루오션을 개척한 게 그다.
이 회사가 설계한 주차빌딩은 하나같이 그 도시의 랜드마크가 됐다. 덩치가 크고 외관이 번지르르해서가 아니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통한 고객 편의성은 그들만의 노하우다. 물론 이런 것은 누가 흉내 낼 수 있다고 치자. 팀 하스의 진면목은 다른 데 있다. 주차빌딩이 들어서는 곳마다 미국 사회의 골칫거리인 우범지대가 사라지고 주변 상권이 살아난다는 점이다. 그게 도시경제 활성화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니 상징적 건물로 인식될밖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SK이노베이션과 일부 접점이 찾아지는 부분이다.
하형록 회장은 부산과 인연이 깊다. 열세 살까지 부친이 목회 활동을 한 부산 한센병 환자촌에서 가족과 함께 살다가 선교사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자수성가했다. 미국 건축계의 대표적인 상을 휩쓸면서 팀 하스를 일하고 싶은 직장으로 첫손 꼽게 만든 근본적인 힘은 기술에 있지 않다. 오너의 남다른 경영철학 때문이다. 비록 기독교 신앙관에 기초한 것이지만 누구나 창업 또는 경영 전략으로 삼을 만하기에 그의 저서와 다큐멘터리가 국내서도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화학 기업인 SK이노베이션의 노사가 도입하기로 한 ‘물가-임금 연동제’는 국내 대기업 첫 시도로 의미가 적잖다. 전년도 소비자물가지수에 맞춰 임금을 올리는 방식인데 가히 획기적이라 할 만하다. 해마다 반복해 온 소모적 노사협상이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대신 노사의 역량을 회사 발전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진정한 상생 모델이다.
생산성은 아랑곳없이 임금을 둘러싼 국내 대기업들의 경직된 노사관계와 갈등비용은 청산 대상이다. 그것이 해당 기업은 물론 중소 협력업체와 지역경제로까지 전가되고 있는 악순환을 생각하면 SK이노베이션 노조의 결단이 더욱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물론 물가-임금 연동 모델은 직원의 평균 연봉이 높은 대기업에만 국한되는 방식일 수 있다. 그렇지만 노사 자율합의로 생산성, 경영실적, 미래경쟁력에 연동한 독자적 임금인상 공식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기자가 보다 주목하는 대목은 따로 있다. 노사가 공동으로 사회적 상생을 위한 기부문화를 제도화한 것이다. 전 직원이 기본급의 1%를 자발적으로 기부하고, 회사도 같은 액수의 기부금을 내서 기금을 만든다고 한다. 이 기금은 협력업체 구성원의 복지 향상과 소외계층 지원 등 사회 공헌에 활용된다. 대기업 노조도 고임금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을 더는 외면해선 안 된다는 점에서 신선하게 와 닿는다.
다시 팀 하스 얘기로 돌아가자. 이 회사의 정신은 ‘우리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그 이윤으로 남을 돕기 위해서라고 한다. 매월 순수익의 30분의 1을 적립하고 예비비 제도를 도입해 곤경에 처한 직원과 이웃, 공동체를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은 조직원의 이해와 동의, 헌신 없이는 힘든 일이다. SK이노베니션에서 팀 하스를 보게 되는 큰 이유다.
새 정부 들어 유난히 자기 목소리 내기만 난무하고 있다. 사회 각 주체가 “해달라”는 요구와 주장만 하고 양보나 희생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운 요즘이다. 그런데다가 문재인 대통령의 인사는 급기야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국회 인준 부결을 정점으로 사실상 참사 수준에 다다랐다. 적임자도 못 찾고 검증마저 부실한 지경을 지켜보기 점점 힘들어진다. 서서히 피로감이 쌓인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 이때 SK이노베이션이 던진 화두는 사이다처럼 청량하다.
이노베이션, 즉 혁신은 무슨 중후장대한 정책이나 계획에서 나오지 않는다. 하나의 실천이 불씨가 돼 들불처럼 번지면서 사회를 바꾸는 것이다. 나눔, 섬김, 배려는 지금 우리 시대의 핵심 가치이자 정신이다. 개인이나 기업할 것 없이 이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발전이 어렵다. 미국의 많은 기업이 팀 하스의 ‘나눔 경영’을 배우려 하고 있다. 그렇듯 사회와 더불어 성장하고자 하는 SK이노베이션도 우리 산업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올 것으로 기대해 마지 않는다.
대기자 by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