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시대 임금은 나라에 재앙이 있거나 국정에 필요한 경우 신하와 백성에게서 바른말을 구했다. 이른바 ‘구언(求言)’이다. “수재와 한재가 서로 겹치고, 바닷물이 붉게 변하는 것은 하늘이 꾸짖는 바가 지극하다.…쓸 만한 말이면 받아들이고, 혹 맞지 않더라도 관대히 용납하겠다. 바른 의논을 듣기 원하노라.” 조선 태종이 1403년 8월 21일 내린 구언령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구언 관련 기사가 1080건 나온다. 518년 역사에서 연평균 2차례의 구언이 있었던 셈이다.

구언은 통치자가 부족함을 인정하고 겸허히 조언에 귀 기울이는 행위라는 점에서 동서고금의 보편적 정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임금 중 정조의 구언은 특히 곡진하다. “조정에는 힘을 합쳐 함께 일해 나가는 아름다움이 부족하고 굶주림을 호소하는 백성들의 원망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첫째는 과인이 부덕한 탓이요, 둘째도 과인이 부덕한 탓이다.” 그는 1781년 10월 17일 천둥소리를 듣고 느낀 바 있어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게 하고 구언을 명했다.

정조는 구언에 응하는 신하들의 행동이 조금이라도 굼뜨다 싶으면 불호령을 내렸다. “천둥소리가 식전에 있었고, 구언하는 전교(傳敎)도 식전에 내렸다. 지금 밤이 깊어가는데도 아직 한 글자의 소장이나 차자(箚子·간략한 상소문)가 없으니, 이는 전에 들어보기 드물었던 일이다.” 그는 구언 당일 바로 보고가 올라오지 않는 것을 꾸짖으며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 관리들을 처벌했다.

“이미 그 말을 구하였는데, 뒤따라 죄를 준다면 말할 만한 사람도 말을 하지 않을까 두려워 특별히 용서한다.” 1468년 12월 9일, 예종은 언로가 막힐 것을 우려해 구언령과 함께 죄 지은 신하를 풀어주기도 했다. 신하들도 임금에게 경연(經筵) 등을 통해 수시로 구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구언하여 할 말을 다하게 하고 잘 처치한다면 그릇된 점을 바루어 아름다움을 이룰 것입니다.” 1568년 1월 12일, 대학자 기대승이 선조에게 아뢴 말이 대표적인 예다.

선인들의 ‘구언 정신’이 태풍 끝 햇살처럼 간절해지는 나날이다. 북한 6차 핵실험, 남한 전술핵 재배치 논란, 사상 첫 헌법재판소장 후보 인준 부결 등 잇단 악재로 나라 위기가 고조되고 있어서다. 구언은 대통령만의 의무가 아닐 터. 하지만 당리당략에 치우친 정치권은 민의를 외치면서도 구언은 뒷전이다. 구언 없는 민의 반영은 불가능한 법. 그들은 요술쟁이인가?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