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밭 대피소나 영실탐방로, 큰두래왓 일대 등 해발 1300m 이상의 한라산 고지대에 오르면 짙푸른 녹색의 바다가 펼쳐진다. 광활한 구상나무 숲이다. 제주 시인 문충성은 ‘구상나무’란 제목의 시에서 그 숲에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구상나무가 내지르는 보라빛 소리’라고 했다. 늘푸른 바늘잎을 촘촘히 두르고 피라미드 꼴로 자라는 구상나무는 원시적 생명력의 표상이다.
어디 삶뿐인가. 구상나무는 주검도 아름답다. 깡마른 하얀 줄기와 가지를 허공에 내뻗은 채 숨을 멈춘 자태가 서서 수행하다 열반에 든 고승을 보는 듯하다. 문 시인은 이를 ‘하얗게 세우는 죽음의 꿈’이라 했다. 구상나무에 ‘살아서 100년, 죽어서 100년’이란 별명이 붙은 건 이런 연유에서다. 한라산은 구상나무의 세계 최초 발견지이자 최대 서식지다. 한라산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데는 구상나무의 역할이 지대했다. 이름은 제주 방언에서 유래했다. 원래 이름은 ‘쿠상낭’. ‘쿠상’은 성게, ‘낭’은 나무다. 열매가 성게를 닮은 나무라는 뜻이다.
이런 제주의 보물, 구상나무가 죽어가고 있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의 연구보고서를 보면, 2006년 738.3㏊로 측정됐던 구상나무 숲 면적이 2015년 626㏊로 줄어들었다. 고사한 구상나무 군락지가 백발 성성한 늙은이 같다. 금세기 내에 한라산에서 구상나무가 사라지고, 그럴 경우 145종가량의 식물도 동반 멸종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이 때문에 2011년 세계자연보존연맹은 구상나무를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했다.
구상나무 고사 현상은 지리산 덕유산 무등산 등 국내 다른 서식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구상나무 고사는 ‘산사태’라는 2차 피해를 부른다. 녹색연합은 2000년 이후 지리산 해발 1700m 지점에서 두 차례의 산사태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훼손 면적이 각각 1만105㎡와 2만9898㎡에 이른다. 녹색연합 측은 “고산지대 깃대종(생태·지리를 대표하는 생물 종)인 구상나무는 뿌리가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퍼져 잘 쓰러지는데, 온난화로 집중호우가 잦아지면서 구상나무 서식지에서 산사태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전했다.
산사태 현장은 처연하다. 녹색 산비탈에 눈물이 흘러내리듯 하얗게 드러난 속살. ‘구상나무의 눈물’인 셈이다. 구상나무 일생이나 인생이나 덧없긴 마찬가지인가?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