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막둥이는 가장 아픈 손가락이다. 사고뭉치인 막둥이가 남산만 한 배를 부여잡은 색시와 함께 집에 온다. 엄마는 연신 한숨을 내쉬고, 아버지는 애꿎은 부채만 흔들어댄다. 싸늘한 안방 분위기는 미뤄 짐작할 만하다. 작심한 듯 엄마가 경대 안에서 고이 간직하던 통장과 도장을 꺼내 막둥이 앞에 내놓는다. “이건 네 몫이다. 곧 어른이 될 터이니 이걸 밑천 삼아 잘살아라.”

누구나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법한 드라마 장면에서 통장은 그동안 쌓였던 가족 갈등을 해소하는 감초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은행 종이통장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놓인 탓이다. 미국은 1990년대, 영국은 2000년대 종이통장 발행을 중단했다.

우리나라 인터넷뱅킹 이용자 비율은 20대 79.8%, 30대 88.0%에 이른다. 종이통장 제작원가는 개당 300원가량이지만 인건비와 관리비를 포함하면 5000~1만8000원이 든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분실이나 훼손 등으로 통장을 다시 만들려면 수수료 2000원을 물어야 한다. 정보기술(IT)을 바탕으로 한 금융 전산화와 온라인 거래 활성화, 마른 수건이라도 짜야겠다는 비용 절감 분위기 속에 종이통장은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셈이다.

금융감독원이 2015년 7월 내놓은 ‘통장 기반 금융거래 관행 등 혁신 방안’이 결정타다. 한마디로 종이통장을 단계적으로 없애겠다는 이야기다. 당장 오는 9월 1일부터 은행에서 계좌를 만들 때 ‘종이통장을 만드시겠습니까, 안 만들어도 되겠습니까’하는 질문에 선택해야 한다. 신규 거래 고객에 대해 원칙적으로 종이통장을 발행하지 않는 혁신 방안 2단계 적용이다. 이를 두고 ‘우리나라에서 종이통장이 발행되기 시작한 시점을 1897년 최초의 상업은행인 한성은행 설립으로 보면 120년 만의 종이통장 퇴장’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종이통장을 선택하지 않는 신규 고객이라면 종이통장 퇴장이 맞지만 60세 이상이나 종이통장을 원하는 사람은 예외이기 때문이다. 혁신 방안 3단계가 시행되는 2020년 9월부터는 종이통장을 발행하려면 일정 비용을 내야 한다. 물론 이때도 60세 이상은 예외다. 당연히 종이통장이 없더라도 전자통장과 예금증서가 있으니 돈을 맡기거나 찾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훗날, 우리의 막둥이는 아들 살림 밑천을 어떤 방식으로 건넬까.

정상도 논설위원 jsdo@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