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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이 흑역사를 어찌할 것인가 /권융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7-06-19 19:19:11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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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클렘은 독일의 정론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서 평생 일하다 은퇴한 사진가이다.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맑고 꼿꼿한 기품이 범상치 않다. 부산 해운대의 고은사진미술관에 가면 지금 그의 전시를 볼 수 있다. 한국과 독일이 공유하고 있는 분단의 경험 때문인지, 독일 통일과정과 관련된 사진이 많다. '포토저널리즘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소련과 동독의 서기장 브레즈네프와 호네커가 딥키스로 우애를 과시하는 장면을 비롯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기념비적 사진이 즐비하다.

전시를 오픈하던 날, 그렇게 작품들을 훑다 보니 몇 점의 인물사진과 마주치게 되었다. 장난기 가득한 영화감독 히치콕, 그리고 시골아저씨 같은 앤디 워홀. 그 두 사람 사이에 모르는 여인의 사진이 있었다. 무심코 해설 자료를 찾아보다가, 벼락을 맞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스트리아 작가 잉게보르크 바하만이었다. 마른 시래기 같은 일상을 보내다가 무청처럼 파릇한 단어 하나가 깊은 기억 속에서 갑자기 떠올랐을 때, 짧은 시간 동안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형언하기 힘든 현상을 한 번쯤 경험해 보셨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10대 중반이었나 보다. 그때 바하만의 '만하탄의 선신'을 읽었다. 바하만은 철학을 전공하고 시인과 작가로서 필명을 날리다가 40대에 요절한, 아주 '시크'한 작가이다. 어제 들은 이야기는 깜깜한데 옛날의 일은 어찌 이리 명징한가. 라디오방송극의 대본인 그 책은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남녀 간 사랑 얘긴데, 그때는 참 난해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읽어내었던 건, 내용에 빠져서라기보다 그런 책을 읽는 내 모습이 좀 멋져 보였기 때문이리라.

그날 만찬 자리에서 갑작스러운 건배사를 부탁받고, 바하만과의 수십 년 만의 조우를 이야기했다. 저쪽에서 듣고 있던 바바라가 술잔을 들고 달려왔다. 지금이라면 몰라도, 그 옛날 변방의 백성들이 바하만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좀 놀라운 일일 수도 있다. 집에 돌아오니 서가 한구석에 그 책이 꽂혀 있었다. 먼지를 털고 책장을 넘겨 보았다. 멋을 부린 글씨로 '1975년 12월'이라고 쓰여 있다. 종이는 누렇고 옹색한 활자체에, 군데군데 곰팡이도 슬어 있다. 다음 날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마치고 바바라에게 그 책을 내밀었다. 신기해하며 책장을 넘기던 그는, 뒤쪽 표지에 있는 바하만의 사진을 보고 표정이 달라졌다. 이거, 내가 찍은 건데. 저기 전시된 사진을 찍고 불과 몇 분 후에 담은 거야.

세상에 이런 일이. 사람들이 몰려와 빛 바랜 책을 돌려보며 이 희한한 우연을 즐겼다. 이 노대가와 이틀을 만났을 뿐이지만, 오랜 시간 인연을 키워왔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그가 가만히 물었다. 사진 아래 한글로 된 설명에 자기 이름이 표시되어 있냐고. 가슴이 철렁하였다. 당연히 그런 설명은 없다. 그때가 언제인데, 사진은 물론이고 책에 대한 저작권도 지켜지지 않았을 것이다. 재밌는 구경거리에 몰려든 다른 독일 사진가들도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바바라의 이름이 나와 있냐고. 낯이 달아올랐다. 곤혹스러운 몇 분이 흐른 뒤, 솔직하게, 마음을 다해, 용서를 구했다. 미안해요, 바바라. 알다시피 그 시절 우리는 까마득한 후진국이었어요. 저작권에 대한 인식 같은 건 아직 없었지요. 정말 미안하지만, 부디 이해주길 바라요. 그는 빙긋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책은 선물로 잘 받겠노라고 했다.

몇 주인가 이어져 오는 청문회 뉴스를 들으며 우리들의 흑역사를 생각한다. 스스로 돌아보니 오래전 복덕방의 권고에 따라 다운계약서를 한두 번 쓴 것 같다. 군 복무는 필하고 위장전입도 없었으나, 지금 기준으로 치면 표절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할 논문도 있을 것 같다. 이를 어쩌나, 무균실의 꿈나무들이 다 자랄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이런 흠결자들이 나라 살림을 살아야 할 텐데. 그러나 정치인들이야 당리당략과 '내로남불'의 원칙에 충실하겠지만, 그리고 가끔은 춤추는 언론보도에 혼란스러워지기도 하겠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를 돌아보면 거의 판단이 선다. 광복절 특사로 전 국민의 흑역사를 세탁해주시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이 있을까. 너무 구린 흑역사는 나서지 마시고, 그럭저럭한 흑역사는 솔직하게, 마음을 다해, 용서를 구하는 수밖에. 하지만 하나만 덧붙이자. 옛날 일은 몰라도, 지금 주변 관리는 좀 잘했으면 싶다. 그때 일도 이해하고, 가족의 잘못된 해명도 또 이해하고. 이해해야 일들이 거듭되면, 그건 역량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경성대 국제무역통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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