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지 않은 흑역사의 모습이 재연되고 있다. 야당이 비토한 '3K' 중 한 사람인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을 문재인 대통령이 직권으로 전격 임명한 것은 뜻밖이다. 국회 표결 대상인 김이수 헌법재판소장은 그렇다 치고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도 임명을 강행할 태세다. 이러면 선거 때부터 요란하게 외치던 협치와 통합을 정권 출범 한 달 남짓 만에 외면하고 마이웨이를 택하는 셈이다.
인사 검증을 대충하고 하루빨리 장관들을 배치해 국정 공백 장기화를 끝냈으면 하는 게 많은 국민의 생각이기도 하다. 헌정 사상 첫 보궐 대선으로 탄생한 정권의 특수성도 이해한다. 그렇더라도 문재인 정부 1기 내각 첫 단추가 이런 식으로 끼워지는 건 우려스럽다. 국회 인사청문보고서 미채택 후보자에 대한 임명 강행은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이 해 온 일이긴 하다. 국정 파트너인 국회를 무시하는 일방통행식 인사 또한 청산할 적폐 아닌가. 그래서 이 정부에선 적어도 사라지리라 여겼는데 보기 좋게 빗나가고 있다. 실망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문 대통령이 절실하게 요구했듯 일자리 추가경정예산안의 원만한 처리는 화급한 현안이다. 새로운 정부조직개편안도 국회 통과가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임명 강행'에 따른 정치적 부담은 오롯이 대통령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당장은 지름길 같아도 그게 가시밭길이 될 수 있는 게 세상 이치 아닌가. 신중하고 장고할 필요가 있어 보였는데 인사에서 밀리면 개혁동력을 상실한다는 판단이 앞섰던 모양이다. 야권을 상대로 힘겨루기를 시작했으니 앞으로가 걱정이다. '위장 협치 쇼'라는 격한 말까지 나오며 정권 초반부터 여야 대치국면이 조성되고 있다. 높은 국정지지율 때문에 국민 눈높이서 검증을 통과했다고 한 것인가. 국민만 믿고 간다고 했지만 국민 눈에는 오만한 태도로 비칠 수도 있다.
'비정상의 정상화'는 문재인 정권의 트레이드마크라고 생각한다. 적폐청산도 그 범주다. 그렇기에 고위공직자 인선 배제 5대 원칙은 뚜껑을 열기 전만 해도 확고하게 적용될 것으로 여겨졌다. 탈세·투기·위장전입·논문표절·병역면탈 비리자는 쓰지 않겠다는 원칙의 실현은 문재인 정부다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위장전입, 논문표절, 다운계약, 부인 취업 특혜 등 의혹을 받은 인사를 공정거래위원장에 임명하면서 스스로 약속을 깨버렸다. 이러려면 대선 때 공약으로 내걸지나 말든지. 이제 와서 이상과 현실 적용은 다르다는 식의 입장을 보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5대 원칙은 결국 포퓰리즘이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 정부 인수위원회 역할을 하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인사검증 기준에 5대 원칙+음주운전, 성추문을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것은 또 뭔 말인가. 방향은 맞지만 앞뒤 안 맞는 소리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흠집내기식 국회 인사 청문회가 폭넓은 인사에 장애가 되고 있다고 했다. 야당의 반대를 위한 반대도 없지 않지만 지금 여당이 야당 시절을 생각하면 감수해야 할 일이다. 5대 원칙을 지키라는 공격을 국정 발목잡기로만 치부해선 곤란하다. 한번 보자. 내놓은 장관급 후보자마다 문제점을 일일이 거론하기 민망하다. 일부는 인사청문보고서가 채택됐지만 멀쩡한 인재가 없다고 할 정도로 '흠결 요지경' 아닌가. 이런 인사를 해 놓고 야당이 딴죽건다고 비난만 하긴 어렵다.
거듭 강조하지만 통합은 갈등을 조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에 달렸다. 모든 걸 다 거머쥐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협치는 이뤄질 수 없다. 큰 맥락에서 양보할 건 해야지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지금 정국을 파행으로 몰아가는 인사 문제도 마찬가지다. 당장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엄청나게 중요하고 긴요해 보이지만 5년 전체를 생각하면 별 일이 아닐수도 있다. 야당과의 타협과 절충이 필요하고 그리 어렵지도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국민을 대신한 국회의 인사 청문회를 무력화하는 독주식 장관급 인사를 계속한다면 부메랑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역대 대통령의 정치적 좌절은 독불·코드·편향 등 인사 패착에서 비롯됐다. 이 정부도 인사 출발은 참신한 느낌을 줬으나 전체 그림을 놓고선 벌써부터 말들이 나오고 있다. 장관급 17명 중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강경화 외교장관 후보를 제외하면 모두 노무현 정부 또는 대선 캠프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친문·보은 인사에 치우치는 바람에 빠짐없이 흠결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백락상마(伯樂相馬)라고 뛰어난 안목으로 천하의 명마를 고르듯 문 대통령도 그러리라 보지만 평가는 냉혹하다. 구멍 하나가 둑을 무너지게 하는 법이다.
문 대통령의 협상과 대화 능력을 높이 사는 사람이 적잖다. 지난 대선 때 타임지도 당시 문 후보를 표지모델로 내세우며 이점을 조명한 바 있다. 독선으로 비치는 인사 처리는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청와대는 천금같은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고 했지만 조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다.
대기자 by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