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기념사 전문을 챙겨보는 습관이 생겼다.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는 쉽고 간결하다. 5000만 독자를 염두에 둔 듯 꾹꾹 눌러쓴 단문은 '문재인' 개인의 화법과 닮았다. 경험과 감성을 버무려 공감을 끌어내 마음을 움직인다. 글 쓰는 기자도 챙겨볼 게 많다.

5·18 기념사는 특히 인상적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없었던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라는 단어가 호소력이 크다. 과거(광주의 진실은 외면할 수 없는 분노였고)에서 현재(오월 광주는 전국을 밝힌 위대한 촛불혁명으로 부활)를 돌아보고 미래(총칼의 상흔이 남긴 아픔을 딛고 광주가 먼저 정의로운 국민통합에 앞장서 주십시오)를 이야기하는 전개도 흡인력이 강하다.

6월 기념사를 읽을 땐 무릎을 쳤다. "6월항쟁으로 성취한 민주주의가 모든 국민의 삶에 뿌리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중략) 민주주의가 정치·사회·경제의 제도로서 정착하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상에서 민주주의로 훈련될 때 민주주의는 그 어떤 폭풍 앞에서도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국제신문의 6월 항쟁 30년 기획 '일상의 민주주의'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기념사에 담백하게 녹아 있다. 야당도 "6월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화답했다. 6월은 민주주의다.

6월 기념식이 열린 부산 광복동에도 '민주의 빛'이 넘쳤다. SNS에도 '나는 1987년 6월 ○○○을 했다'는 경험담이 물결쳤다.

친분이 있는 한 자유한국당 당원에게 6월을 물었다. "민주주의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닌데 우리는 왜 5·18과 6월항쟁을 터부시했을까요."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봤냐고 했더니 그는 "민주당의 팬덤이 이제 스토리에 감성을 입혀 신화까지 만드는 것 같다"고 했다. "문자폭탄도 나쁜 게 아닙니다. 싫어하는 정치인에게 의사를 표시하는 것도 민주주의잖아요."

한국당도 팬덤의 정치가 부러웠던 모양이다. 7·3 전당대회에서 모바일 투표를 전면 도입을 선언했다. 그동안 친박근혜계는 대리투표를 포함한 부정선거 우려가 해소되지 않았다며 모바일 투표에 부정적이었다. 그들이 돌아선 건 '손가락 민주주의'의 위력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의 성과 중 하나는 '탈권위'이다. 이제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야외 행사에 초청장 없이도 들어간다. '초청장 받았는데 축사 안 시켜 준다'는 정치인은 폭탄을 맞는다. 대통령이 등장하는 영화도 통편집 당하는 시대다. "(문 대통령이) 법조인답게 날짜까지 정확히 얘기하면서 휴먼 다큐를 법정 드라마로 만드시더라. 재미가 없었다."(영화 '노무현입니다' 감독 인터뷰) 영화인들은 이제 블랙리스트 걱정 없는 세상에 산다.

민주주의가 물처럼 흐르는 6월. 아쉬움도 있다. 정치의 영역이 특히 그렇다. 우선 '위대한 반대자'가 안 보인다. 대통령 지지율이 80% 안팎인 요즘이 '야당의 시간'이 아닌 건 맞다. 그래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소수의견을 통해 희망을 보여줘야 한다. '적폐' 꼬리표가 달린 한국당은 특히 변해야 한다. 한국 정치가 대권 후보를 중심으로 모이는 메카니즘인데도 인물이 너무 없다. 당권 경쟁을 앞두고선 '도로 친박당'이란 비판에 아랑곳없이 끼리끼리 결집하는 것 같다. 패장인 홍준표 전 경남도지사 역시 이전투구의 늪에 빠졌다. "주사파 정권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들 못지 않는 이념적 무장이 필요하다"(지난 12일 홍 전 지사 페이스북)는 식의 편가르기로는 다음 정권도 기약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전략이 앞서는 것도 아니다. 추가경정 예산안을 벼르는 야당에게 문 대통령은 국회에서 고개를 숙였다. 적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한신의 인내'다. 야당이 강경할수록 문 대통령은 국민에게 자주 프레젠테이션을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론 대통령이 더 자주 져주길 바란다. 국회선진화법으로 야당 도움이 없으면 어떠한 개혁 입법도 불가능하지 않나. "(노 전 대통령이) 져줬더라면 더 위대한 대통령이 됐을 텐데"라는 유시민 작가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내각 인선 과정에서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취임사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 있다면 한 번쯤 재고할 필요가 있다. 새 정부는 촛불혁명 위에 건설됐고, 촛불혁명은 한층 높아진 공직자의 도덕적 잣대를 원하기 때문이다. 음주운전 안 하고, 능력과 함께 청렴한 인물은 대한민국에 많다. 정치에도 민주주의가 물처럼 흐르길.

사회1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