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이 가는 길은 대충 정해져 있다. 패장이랄 수 있는 대통령 후보는 정계 은퇴를 하거나 최소한 일시적으로라도 백의종군하는 게 보통이다. 그게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했지만 보답을 못 한 유권자와 당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당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길을 터주려는 배려이기도 했다. 당은 당대로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는 한편 리모델링에 들어간다.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전당대회를 통해 새 지도부를 구성해 차기 정권 탈환을 도모하는 진용을 갖추는 절차가 그것이다.
그런데 집권당에서 야당으로 전락한 자유한국당의 행로는 이런 틀에서 한참 벗어났다. 대선후보는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바퀴벌레' 운운하며 당권탈환을 노리고 있고, 친박 핵심은 '제정신이야, 낮술 드셨냐'라고 치받았다. 여기에 전 원내대표는 '육모방망이로 뒤통수를 뽀개야 한다'며 응징론을 펼친다.
선거에서 진 패장은 자숙할 생각이 전혀 없고, 국정농단 사태로 결과적으로 대선 패배를 초래한 친박은 석고대죄 시늉도 하지 않는다. 모두 7월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쥐어 정치 생명을 연장하는 데에만 골몰한다. 정치생명 연장이 전부가 아니다. 내년 지방선거 공천권은 물론 개헌이 불발되면 3년 뒤 총선, 5년 뒤 대선의 권력 지도까지 그려볼 기회로 여기는 듯하다.
대선후보였던 홍준표 전 경남지사는 '후보조차 내지 못해 망해가는 당을 내가 나서서 이 정도 득표해 그나마 건사한 것 아니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가 받은 득표율은 24%다. 물론 적지 않은 득표다.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의 6.8%까지 끌어다 보수진영이 30.8%를 차지했다고 자위하기도 한다.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 득표율 36.6%에 근접한 것 아니냐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은 대선 역사상 최대 득표차인 557만 표로 패배한 정당이며, 진보 중도(문재인 안철수 심상정) 득표율 68.7%의 절반도 안 되는 지지에 그쳤다.
또 홍준표가 잘 나고 대통령이 될 만하다고 해서 표를 줬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착각은 자유다. 보수 유권자들이 반기문→안희정→황교안→안철수를 거쳐 홍준표로 유랑하는 정치적 유목민이 된 것은 모두가 안다.
그런데도 대선 패배 원인 분석과 반성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5년 전 대선에서 패배한 뒤 '1219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라는 책을 통해 패인을 분석하고 정권교체 의지를 벼렸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진보 집권 플랜'을 써서 말 그대로 민주당 진영에 집권 플랜 교과서를 내놨다. 구원투수로 등장한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은 '해당(害黨) 행위자는 개작두로 치겠다'면서 봉숭아 학당 같은 당의 기강을 잡아나갔다.
보수의 가치는 무엇인가. 보수정당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공동체, 공익, 국가, 헌신, 책임, 희생, 가족, 전통 등의 단어를 나열하며 보수의 가치를 설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보수정당인 자유한국당이 실제로 정치현장에서 공동체 우선, 국가에 대한 헌신과 희생, 전통의 존중, 가족의 중시 등을 위해 노력해 왔는가. 오히려 득표율은 저조했지만, 유승민 후보가 주창한 '안보는 보수, 경제는 개혁'이라는 주장이 보수의 가치에 들어맞아 보인다.
한국의 보수정당만큼 지향해야 할 가치에 무신경하고 무지한 정당도 없을 것이다. 무조건 좌파 용공 친북 딱지를 붙이는 걸로 만사 오케이다. 부의 집중을 문제 삼으며 분배의 정의를 말하면 공산주의식 사고방식이라고 하고, 복지를 얘기하면 좌파 논리라고 덮어씌운다. 눈 밝은 유권자들이 이런 케케묵은 수법에 더는 속지 않는데도 보수정당은 아직도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입헌주의에 기반을 둔 법치주의와 삼권분립, 사상과 양심의 자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공정한 시장경제 등 보수가 추구해야 할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한국의 보수정당은 존중하고 지켜왔는가. 외려냉전 반공주의와 천민자본주의에 중독돼 기득권에만 집착하면서 탐욕에 눈멀지 않았는가. 한국의 보수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있는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 영국 보수당을 이끈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오두막이 행복하지 않으면 궁전도 안전하지 않다'고 말했다. 산업혁명으로 빈부 격차가 극심해지자 '두 개의 국민'이 생겼다며 엘리트의 책임의식, 약자에 대한 배려에 당 정책의 초점을 맞췄다. 그렇게 영국을 '하나의 국민'으로 묶었고 복지사회의 기틀을 놓았다. 사회개혁, 노동조건 개선, 참정권 확대에 앞장선 것은 진보적 정치인이 아니라 '보수당의 아버지' 디즈레일리였다.
자유한국당이 보수의 가치를 찾아 새롭게 재탄생할 수 있을까. 요즘 TK까지도 등을 돌린 보수 유권자의 마음을 다시 얻을 수 있을까. 디즈레일리의 말에 일말의 해답이 있는지 모른다.
'늙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선거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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