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시골로 내려간 전직 대통령이 여생을 유유자적 보낼 꿈에 부풀어 있었다. 쉬엄쉬엄 자서전이나 쓰면서 말이다. 해방감을 만끽할 참이었는데 하필이면 그곳 관할 시장이 공석이었다. 마땅한 인물이 없던 차 동네 주민들의 권유로 전직 대통령은 의도치 않게 출마를 했다. 손쉬운 당선이 예상됐으나 사람 좋기로 평판이 자자하던 철물점 주인이 갑자기 후보로 나섰다. 전직 대통령 vs 평범한 시민의 흥미진진한 맞대결. 13년 전 제작된 할리우드 코믹 영화 '웰컴 프레지던트'의 줄거리다.
이 영화가 불쑥 떠오른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한 말 때문이다. "빈손으로 취임하고 빈손으로 퇴임하는 깨끗한 대통령이 되겠다.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시민이 되어 이웃과 정을 나누며 국민 여러분의 자랑으로 남겠다." 이 대목이 특히나 귀에 꽂힌 이유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대통령 하기도 힘들지만 전직 대통령 하기도 힘든 나라 아닌가. 누구나 성공하겠다는 다짐으로 청와대에 들어갔지만 그 끝의 평가는 냉혹했다. 그런 만큼 고향 사람들이 진정으로 "웰컴"하며 퇴임 대통령을 반기는 날이 오길 기대하는 건 비단 기자만이 아닐 듯싶다.
60%의 반대와 정치 역학구도 또한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국정을 시작한 문 대통령의 초반 행보는 무난해 보인다. 일하는 청와대를 위한 발탁 인사와 북한 미사일에 대처하는 대북 강경 메시지 등 일련의 조치는 '준비된 대통령'이 빈말이 아닌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럼에도 더 후하게 덕담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집권 초반 골든타임인 3개월은 지켜봐야 5년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거라 여기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매일 직접 챙기겠다는 '일자리 100일 플랜'의 성과를 눈여겨보고자 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사상 초유의 일을 겪으며 탄생한 정부이기에 어느 때보다 첫 단추가 중요하다는 데 이론의 여지는 없다. '나라'를 위한 권력이 아니라 '나'를 위한 권력에 톡톡히 당한 국민 아닌가. 한마음으로 잘 되길 염원하는 게 우선일 것이다.
유세 때 제시한 정책을 다 지키려 하다간 스텝이 꼬일 수 있으니 공약 다이어트부터 하라, 대통령이 직접 장차관과 소통해 지시 왜곡과 업무 비효율성을 없애라, 역대 대통령의 정치적 좌절은 인사 실패에서 비롯됐다는 등 조언이 쏟아진다. 귀담아들어야 할 말들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치밀하게 준비한 문재인표 정책을 과감, 신속하게 실행에 옮기는 일이다. 그것이 실패할 확률을 줄이는 길이다.
문재인 정권의 성패는 결국 국정철학으로 제시한 개혁과 국민통합에서 갈릴 수밖에 없다고 본다. 사실 개혁과 통합은 어느 정권할 것 없이 취임 초 국민 시선을 잡기 위해 시도했으나 용두사미로 끝났다. 개혁만 하더라도 달리는 차의 바퀴를 끼우는 만큼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 아닌가. 강단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문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검찰을 향해 칼을 뺀 것에 대해 국민적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대선 때 모든 후보가 각론에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이나 검경 수사권 조정 등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공감대를 이룬 터에 운도 따른다. 때맞춰 서울중앙지검장과 법무부 검찰국장의 '돈봉투 만찬' 사건이 터져 검찰개혁에 가속도가 붙게 생겼으니 말이다.
정권에 굴종하면서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휘둘러온 검찰에 메스를 가하는 일은 문재인 색깔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사안이다.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로 번번이 끝난 역대 정부의 전철을 밟으면 재벌, 공공기관 등 여타 분야 개혁도 동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개혁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각오로 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검찰개혁 하나만 이뤄내도 절반은 성공하는 셈이라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
국민통합을 위해선 탕평인사 원칙이 내내 지켜져야 한다. 처음엔 시늉을 냈다가 결국엔 측근 나눠 먹기로 흘러 어려움을 자초한 정권을 우리는 되풀이해 봐왔다. 현 정부 창업 공신들의 2선 후퇴가 신선하게 와닿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라는 국민 명령을 무겁게 여긴다면 끝까지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통합의 리더십은 사회 갈등을 조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다. 박근혜 정부만 해도 '국민 100% 통합' 운운했지만 외치면 외칠수록 더 찢어졌다. 갈등의 '조정자'가 아니라 블랙리스트다 뭐다 해서 갈등의 '조장자'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통과 협치가 더욱 요구되는 게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퇴임 후 옛집으로 돌아가 보수 좋은 명예직 제의를 다 거절하고 군인연금으로 동네 사람들과 어울린 게 여생의 낙이었다 한다. 카터도 백악관을 떠나 조지아 주 땅콩농장에 돌아가 봉사·평화활동으로 '최고 퇴임 대통령'에 꼽혔다. 인도의 11대 대통령 압둘 칼람은 재임 5년간 자국 과학 발전을 앞당기고 옷 가방 두 개와 책 꾸러미만 들고 낙향했다. 업적은 쌓고 빈손으로 금의환향하는 대통령을 우리는 5년 뒤 볼 수 있을까.
대기자 by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