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4월 15일, 한국의 철원 계곡. 북한의 대규모 전차부대가 밀고 내려왔다. 특수전 부대가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에서 폭동을 유발한 지 9일 만이다. 미군 2사단은 탄저균 테러를 당해 병력의 절반을 잃었다. 북한군 침공 이틀 뒤 서울 방어선이 무너졌다.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대구에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한 뒤 반격에 나선다.'
물론 실제 상황이 아니다. 미국 국방부의 전쟁 시나리오일 뿐이다. '넥스트 워.' 레이건 정부 시절 7년간 국방부 장관을 지낸 캐스퍼 와인버거의 책이다. 1997년 9월 출간돼 미국의 군사전략을 엿보게 한다. 와인버그는 전략방위구상(SDI) 등 미국 군사전략의 대강을 수립했던 인물. '스타워즈'로 불린 SDI는 요즘 말썽이 되고 있는 사드의 할아버지다.
와인버그는 5개의 전쟁을 기술하고 있다. 북한과 중국의 한국 대만 침공, 일본의 남태평양 침략을 비롯해 러시아, 이란, 멕시코가 일으키는 전쟁이다. 전쟁에서는 한국에 대한 배려를 찾을 수 없다. 그저 세계전략의 희생양일 뿐이다.
한국은 주 변수는 차치하고 종속 변수조차 되지 못한다. 그 첫째 증거는 핵 전쟁이다. 낙동강 전선에서 밀리기 시작한 북한은 핵폭탄을 터뜨려 반전을 시도한다. 이어 미국이 북한의 지휘부와 영변에 핵 보복을 가한다. 서울 전선에서 밀린 중국군은 다시 한번 중부 전선에 핵폭탄을 투하한다. 고심하던 미국은 중국이 아니라 중국군이 주둔한 한국에 핵 폭격을 가한다.
책을 읽으면 울화통이 터진다. 핵전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한국 몫이다. 북한이 터뜨린 핵폭탄은 히로시마 원폭의 배 규모. 서울에 떨어지면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해자의 10배 이상이다. 그것도 모자라 중국과 미국의 핵폭탄이 터지면? 이런 가공할 피해를 입고도 결국 전쟁은 정전협상으로 끝난다. 한국은 배제된 채 미국과 중국의 타협으로 말이다. 전쟁의 권한도, 협상의 권한도 우리에겐 없다.
시대 배경은 정확히 20년 전이다. 그러니 당시의 전쟁 시나리오를 똑같이 적용하기는 힘들다. 그렇긴 한데, 전쟁을 대하는 미국의 자세를 엿보는 건 대단히 꺼림칙하다. 한국 정부나 한국군은 존재조차 없다. 미국과 중국이 모든 걸 결정하고 있다.
다시, 2017년 4월이다. 지난 8일 미 태평양사령부는 칼빈슨호가 진로를 변경해 서태평양으로 출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15일 대만의 중앙통신은 항공모함 니미츠호도 함께 이동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칼빈슨호의 갑작스러운 진로 변경, 이동 중인 니미츠호, 일본에 머물고 있는 로널드 레이건호 등 3척의 항공모함이 한반도로 집결하고 있다는 오해를 일으켰다.
여기에다 중국 잠수함 20척의 한반도 주변 이동, 북중 접경지역 병력 15만 명 증강 배치, 북부전구에 4급 전시대비령 발령 등이 잇따라 보도됐다. 일본은 공군부대의 대규모 발진 훈련이니, 일본인 소거 대책이니 하면서 풀무질이 한창이다. 한반도 위기설로 와글와글하는 와중에 한국 군과 정부만 고요하니 기괴한 대비다.
지난 19일에야 사실이 드러났다. 미군 당국자가 칼빈슨호는 호주와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25일쯤 한국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밝힌 것이다. 니미츠호도 한국이 아니라 중동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무려 11일간 한국민은 위기설에 농락당했다. 그러고는 미국 왈, 시점을 특정하지 않았기에 문제가 없다나, 뭐라나. 우리 정부와 군이 함구한 이유는 뭘까. 몰랐다? 알고도 입을 닫았다? 참, 답답한 노릇이다.
모든 게 지난 7일 미중 정상회담 이후 벌어진 일이다. 회담은 공동선언문도, 기자회견도 없었다. 중국은 생산적 회담, 한국은 성공적이라 했다. 중국의 첫 조치는 평양행 여객기의 운항 중단. '북핵 타격 군 개입 않지만 38선 넘어 지상 침략 땐 군사개입 하겠다.' 그리고는 북핵 6차 실험 땐 원유공급 중단이 아니라 축소란다. '한때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 게에게 똑바로 걷는 걸 가르치긴 불가능하다더니 꼭 그 짝이다. 자기 중심주의는 대단히 소아병적이다. 시점은 과거지만 그냥 과거가 아니다. 현재화된 과거다. 세상에 믿을 나라가 없다.
우리는 모른다. 양국 정상회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하나, 최근의 진행 상황으로 보아 꽤 거친 이야기가 있었던 듯하다. 문제는 이런 모양새가 '넥스트 워'의 전쟁 게임과 판박이란 점이다. 우리의 생사를 좌우하는 전쟁이다. 한데, 우리에겐 선택권도, 협상권도 없다.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미중의 의지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게임? 그것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전쟁이든, 협상이든 그것은 우리의 주권 문제다. 그게 훼손되는데도 모두들 침묵이다. 침묵은 무언의 승낙이라고 했다. 행동은 이유를 말해 주고, 이유는 결과를 예측하게 한다. 미중의 행동을 보고도 이를 모르면 그 끝은 비극뿐이다. 정부와 대선 주자는 그 닫은 입을 열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야 할 게 아닌가.
논설고문 aiwi@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