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30년 전인 1987년, 일본 효고 현은 암 극복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고베 시가 현청 소재지인 효고 현은암 예방과 치료가 발등의 불이었다. 일본에서 암 발생률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주요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가 1992년부터 추진돼 2001년 4월 문을 연 현립입자선치료센터다.

고베 시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하리마과학 공원도시에 자리 잡은 효고현립입자선치료센터는 종합 리조트 같은 분위기였다.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 5만9000㎡에 이르는 넓은 부지, 잔디밭 산책로 테니스 코트와 인근 골프장까지 도무지 병원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50병상 규모인 이 센터의 환자들은 하루 두 차례 30분가량 이뤄지는 암 치료 시간을 빼면 집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훨씬 편해 보였다. 전담 의료진이 개인별 수면·식사 관리, 맞춤형 운동 프로그램을 도와주고 있었다.

이 센터는 효고 현이 280억 엔을 부담하고 정부가 30억 엔을 보태 조성됐다. 우리나라 돈으로 3000억 원이 넘는 규모이나 정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가 주도했다. 최첨단 암 치료 설비인 중입자가속기를 과학단지와 연계해 운영한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2003년 이곳을 찾았을 때 "일본 암 극복 의지의 상징"이라고 강조했던 책임자의 말에서 명확한 목표 설정, 정부와 지자체의 역할 분담, 일사불란한 실행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총치료비가 3000만 원을 조금 넘었다. 이런 노력 덕분일까. 지난해 일본 국립암연구센터가 내놓은 지역별 암 환자 현황 자료는 효고 현 암 발생률이 후순위로 내려앉았음을 보여 준다.

중입자가속기는 난치암, 재발암, 수술이 불가능한 암에 효과가 커 '꿈의 암 치료기'로 불린다. 완치율이 전립선암 100%, 간암 90%, 폐암 80%, 재발암 42% 수준이다. 중입자 치료는 몸 깊숙한 곳에 있는 암세포만 골라 파괴하니 부작용이 적다. 그 원리는 브랙 픽 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탄소 중입자를 빛에 버금가는 속도로 가속해 암세포를 없애는 과정에서 기존 X선과 달리 암 부 위에 도달하기 전에는 20~30%의 방사선량만 전달하고, 암 부위에 나머지 70~80%의 방사선량을 집중적으로 전달한다. 그러니 중입자가속기는 치료 횟수가 많아야 10회가량이고, 치료 기간도 1~2주로 짧다.

이런 중입자가속기를 부산에 도입하자는 논의가 2010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암 전문병원인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이 개원한 그해다. 차세대 암 치료 설비를 바탕으로 부산을 동북아 의료허브로 만들자는 기대에 부풀었다. 기장군 동남권 방사선 의·과학산업단지 조성이 더해졌다.

국비 700억 원에 부산시와 기장군이 각각 250억 원, 원자력의학원이 750억 원 등 모두 1950억 원을 연차적으로 투입하기로 협약했다. 백미는 일본이나 독일 등지에서 사용하는 싱크로트론 방식보다 작고 편리한 사이클로트론 방식을 자체 개발해 세계 중입자가속기 시장을 주도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전례가 없는 도전보다는 검증된 방식을 택하기로 방침이 바뀌면서 3년을 까먹었다. 적자에 시달리던 원자력의학원은 분담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그동안 동남권원자력의학원 뒤편 중입자가속기 치료센터가 1000억 원을 들여 완공됐지만 2021년까지는 개점휴업 상태다. 급기야 원자력의학원은 서울대병원과 750억 원을 투자하는 조건으로 동남권원자력의학원 및 중입자가속기 치료센터를 최소 10년간 독점 운영하는 권리를 보장하는 협약을 할 예정이다.

효고 현과 달리 부산의 중입자가속기 도입은 갈팡질팡 그 자체다. 약속을 어긴 원자력의학원과, 원자력의학원을 관리 감독해야 할 정부를 질책하지 않을 수 없다. 발등의 불보다 급한 암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부산시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부산의 암 지표는 악화일로다. 2015년 기준 부산의 암 사망률은 인구 10만 명당 108.3명으로 전국 2위다. 간암 사망률은 7대 도시 가운데 1위이고 주요한 간암 원인인 C형 간염 유병률은 전국 최고다. 위·대장·자궁경부암 사망률은 7대 도시 중 2위다. 최근 부산은 전국에서 치료가능 사망률이 가장 높은 곳이라는 불명예까지 떠안았다. 표류하는 중입자가속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더하는 이유이다.

특히 서울대병원의 부산 진출을 막무가내로 막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중입자가속기 도입 과정에서 부산 의료계의 참여 기회를 찾으며 상생할 수 있는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 부산의 대학병원들이 서울대병원에 앞서 내민 손을 뿌리쳤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고 그동안 부산 의료계는 최신 의료시설 및 장비와 우수한 의료진을 갖췄지만 상대적으로 저평가됐다고 주장하지 않았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중입자가속기 도입을 학수고대하는 암 환자와 그 가족이 많다. 선진국일수록 지방자치단체가 의료 정책을 주도한다. 부산시와 부산 의료계가 냉정하게 반성해야 할 일이다.

논설위원 jsdo@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