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은 암호와의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선이 넓어 피아를 막론하고 군사작전 대부분이 암호로 하달됐다. 이걸 도청하거나 첩자를 통해 몰래 빼내 푸느냐 못 푸느냐에 따라 전세가 달라졌다. 정복 전쟁을 빈번하게 벌였던 도시국가 그리스의 원통형 막대기로 시작된 암호가 참혹한 화염 속에서 체계화되고 발전한 것 또한 역사의 진보이리라.
개전 초기 연합군은 '에니그마'라는 독일 암호 시스템 때문에 피해가 막심했다. 골치를 앓던 영국이 개발한 비밀 병기가 세계 최초로 평가받는 진공관 컴퓨터인 '콜로서스'다. 독일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이를 통해 상대의 암호를 해독하고 연합군 작전은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한 덕분.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은 콜로서스 개발의 주역이자 독일 해군의 무시무시한 U보트 암호 체계인 텔레타이프를 깨는 데도 기여했다. 히틀러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에니그마와 텔레타이프 암호를 들킨 사실을 몰랐다 하니천만다행이었다.
미국이 태평양에서 일본을 패퇴시킨 무기 중 하나도 '코드토커'라는 암호 통신병이다. 정보가 자꾸 일본에 넘어가는 바람에 전세가 불리해지자 미국은 나바호족을 주목했다. 인디언 출신인 이들의 언어는 복잡하고 글자가 없었다. 자기들만 소통이 가능했기에 미국은 나바호족 400여 명을 암호 임무에 투입했고, 사이판·이오지마 등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2002년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을 맡은 영화 '윈드토커'도 이를 소재로 해 눈길을 끈 바 있다.
군 등 특정 집단과 상황에서 주로 쓰이던 암호가 일상 속에 들어온 것은 컴퓨터에 이은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인해서다. 사용자만이 접근 가능하도록 한 비밀번호, 패스워드는 곧 개개인의 암호다. 이 개인 암호가 새삼 주목을 받은 건 최순실 씨가 썼다는 태블릿PC 때문. 1대는 지난해 10월 24일 한 방송사가 저장된 내용을 보도하면서 최 씨의 국정농단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지난 1월 공개된 새로운 태블릿PC는 특검이 확보한 중요한 증거 중 하나가 됐다. 이걸 열어보는 게 문제였는데 최 씨의 조카 장시호 씨가 "이모가 사용한 암호 패턴은 'L자' 모양"이라고 제보한 게 결정적 도움이 됐다고. 그 안에서 186통의 이메일을 확인해 태블릿PC를 쓸 줄 모른다던 최 씨의 주장이 거짓임을 확인했다는 게 특검의 최종 수사 결과다. 나라를 뒤집어 놓은 사람치고 암호는 의외로 단순했다. 아마도 작금과 같은 일이 벌어지리라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변영상 수석논설위원 by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