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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칼럼] 열정의 끝까지 갔던 화가 유영국

한국 추상미술 선구자…'산' 소재 작품 보며 친근감

불타는 예술혼·창작에 몰두한 삶은 우리에게 교훈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7-02-23 19:40:43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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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을 접하면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감흥이 일어난다. 이 흥미롭고도 신나는 흥취를 나는 최근에 느꼈는데, 그것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화가 유영국의 작품들을 접하고 난 후였다. 유영국 탄생 100주년 기념전 '절대와 자유'가 열리고 있었다. 그림에 대해 까막눈인 내가 설렘을 느꼈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도 놀라웠다. 게다가 유영국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았으니 그의 작품들은 낮은 안목을 가진 내게 난해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가 호수 바다 수평선과 해안 등을 소재로 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가 무엇보다 산을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산골에서 나고 자란 나의 경험 혹은 기억이 그의 작품에 친근감을 느끼게 해서 해석의 두려움을 덜어준 것이 아닐까도 싶다.
   
그 자신도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라고 했고, "내 그림은 주로 '산'이라는 제목이 많은데, 그것은 산이 너무 많은 고장에서 자란 탓일 게다. (…) 무성한 잎과 나뭇가지 사이로 잔디밭에 쏟아지는 광선은 참 깨끗하고 생기를 주는 듯 아름답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신석정 시인이 시 '내 가슴속에는 제삼장(第三章)'에서 "내 가슴속에는/ 하늘로 발돋움한 짙푸른 산이 있다/ 산에 사는 나무와 나무에 지줄대는 산새가 있다// 내 마음속에는/ '산같이! 산같이!' 하던 '내'가 있다/ 오늘도 산같이 산같이 늙어가는 '내'가 있다"라고 쓴 것과 유사한 맥락에 있다고 하겠다.

유영국 그림에서의 산은 깊은 계곡, 나무들, 해와 달, 계절과 함께 있었다. 산을 통해 그는 생명의 씨앗을 품은 흙, 갖가지의 높고 낮은 지형, 새로운 신록, 낮과 밤의 교체, 물든 잎사귀, 동토(凍土)와 해토(解土) 등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 하나의 산은 겹겹의 산과 함께 어울려 있었고, 동시에 산맥에서 나뉘어 갈라진 단독의 산으로서도 존재하고 있었다. 산을 소재로 해서 그는 '관계'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산이 산과 조화롭게 호응하고 있었고, 산이라는 하나의 큰 시공간 내부에 사는 존재들은 서로 대등하게 주고받고 있었다.

'산'을 주로 그린 시기에 그는 이렇게 언급했다. "예순 살까지는 기초를 좀 해 보고, 이후 자연으로 더 부드럽게 돌아가 보자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 앞에서 느끼는 팽팽한 긴장감, 그 속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각오와 열의를 배운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긴장의 끈을 바싹 나의 내면에 동여매고 작업에 임할 것이다." 60세가 될 때까지의 작업을 기초를 공부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한 것에는 겸손함이 묻어 있는 것이겠는데, 무엇보다 "자연으로 더 부드럽게 돌아가 보자"라고 표현한 대목에서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완곡함이 느껴졌다.

유영국의 연보에는 눈에 띄는 일이 많다. 1916년 울진에서 태어난 그는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를 돌연 자퇴하고 1935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 문화학학원에 입학해 추상미술의 유력한 리더들과 교류를 했다. 1943년 귀국해서는 어부와 양조장 주인으로 살았고,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했다. 첫 개인전을 연 것은 48세 때의 일이었고, 이 첫 개인전 개최 후 2002년 타계할 때까지 전업 작가로서 오직 집과 작업실만을 오가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그는 하루하루를 철저하게 규칙적으로 통제하면서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매일 아침 8시부터 작업실에서 작업을 시작하면 오후 6시까지 꼼짝하지 않고 제작에 온 힘을 쏟았으니 실로 놀라운 열정이 아닐 수 없다. 규칙적인 일과에 대해 그의 아내는 "남편이 자주 아팠기 때문에 잃어버린 시간을 메우려고 속으로부터 생겨난 습관"이라고 말했다.

1975년 만 59세에 이르러서야 처음 작품이 팔리기 시작했는데도 그는 일생을 오직 전업 작가로 살았다. 1977년부터 심장 박동기를 달고 살았고, 8번의 뇌출혈과 37번의 입원 생활을 하면서도 400여 점의 아름다운 유화작품을 세상에 남겼다.
미술계에서는 그의 작품에 대해 "회화적 아름다움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고, 특히 그는 색채의 변주에 능해 "같은 빨강 계열의 작품에서도, 조금 더 밝은 빨강, 진한 빨강, 탁한 빨강, 깊이감 있는 빨강 등 미묘한 차이를 지닌 다양한 '빨강들'이 탄탄한 긴장감을 제공하며, 동시에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낸다"고 높이 평가받았다.

훌륭한 예술 작품의 탄생 이면에는 예술가의 치열한 예술혼이 숨어 있다. 유영국의 작품과 그의 생애에 대해 알게 되면서 나는 근래에 내가 사석에서 만났던 문단의 어른 한 분이 "원고지 3000매를 썼는데 500매를 쳐야 해"라고 말해 나를 놀라게 했던 기억이 떠올랐고, 또 다른 분이 "나는 싱거운 시는 안 써. 같은 정도의 같은 수준의 시를 쓰는데 이젠 한 칠팔 년 전보다 두세 배는 힘이 들어. 깊이깊이 생각하면서 써야 해"라고 말해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던 일이 떠올랐다.

동시에 밀란 쿤데라가 쓴 다음의 글이 생각났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한다. 행동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 열정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고 나서 그다음엔 처음으로 셈을 해보는 것이다. 그 전엔 절대로 셈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삶에 대한 셈은 그대에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낮게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간섭받지 않고 자유로워지고 싶었기 때문에 미술을 선택했다는 화가 유영국. "창작과정에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나는 항상 뚫고 나갈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작품은 다음 작품을 위한 과정이고 계속 작품을 해야 하는 근거가 된다"는 그의 말은 매일 매일을 온갖 세파(世波)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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