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광장에선 촛불과 태극기가 타협 없는 싸움을 벌였다. 주말마다 이어진 낯설지 않은 광경인데, 양쪽 다 끝이 다가옴을 예감한 때문인지 그 규모가 훨씬 커졌다. 촛불은 태극기를, 태극기는 촛불을 인정하지 않는다. 중재자는 없다.

시기상으론 촛불이 먼저였다.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켰고, 국정 농단의 주범을 법정에 세웠다. 수많은 국민이 촛불에 환호했다. '촛불혁명'이란 평가도 나왔다.일방적으로 흐르던 게임은 태극기의 등장으로 달라졌다. 그러나 태극기를 바라보는 시선은 대체로 싸늘하다. 촛불을 "북한의 지령"이라 하고, "계엄령이 답" "군대여 일어나라" 등 극단적 주장을 쏟아내는 탓이다.

태극기를 든 이는 대부분 노인이다. 노인들은 왜 이처럼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광장에 나섰을까. 뜻밖의 계기로 그들의 심정을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해해보려 한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1944년생으로 1962년에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평생을 부산에서만 사는 사람입니다." 최근 자신을 김○○이라 밝힌 독자에게서 한 통의 이메일이 왔다. "2017년 2월 13일 자 국제신문 4면 '전쟁통서 문화 꽃피운 다방…'을 읽고 이 글을 보냅니다. 정독 바랍니다."

올해 74세인 독자는 중구 부평동 오아시스다방을 꼭 복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독자가 쓴 글을 보면, 그의 대학 시절인 1960년대엔 모두가 가난했다. 하루 저녁에도 수차례 정전됐던 그때, 젊은이들의 유일한 낙은 '한밤의 음악편지'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을 반영하듯 당시 중구 일원엔 음악다방이 참 많았다. 이 다방 중 "하루 두세 번은 찾던" 독자의 단골집이 바로 오아시스란다.

"막걸리를 마시다가도, 학과 시험을 치고 난 후에도, 전화기조차 드물었던 그 시절 여자친구와 통화하거나 만날 때도… 오아시스다방은 그 삭막했던 시절 '사막 속 오아시스'였습니다." 이 독자는 지금도 부평동을 지날 때면 일부러 오아시스다방이 있던 자리를 찾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아시스다방의 추정 위치를 표시한 지도와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현장 사진을 첨부했다.

독자는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오아시스다방이 다시 문 열었다는 소문이 나면 숱한 사연과 추억이 얽힌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겠는지요. 다방에서 옛 얘기 나누며 차 한 잔 한 뒤에 옛 도심을 따라 남포동으로 방향을 잡거나, 국제시장 쪽으로 해서 보수동 책방골목으로 가거나, 용두산공원을 오를 수도 있겠지요… 낭보를 기다립니다."

'젊은이는 희망에 살고, 노인은 추억에 산다'는 프랑스 격언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즘 세상, 노인의 추억을 끄집어낼 매개체는 죄다 사라지고 없다. 어쩌면 노인의 추억을 인정하지 않는다.

'할배의 탄생' 저자 최현숙 씨는 직접 태극기 집회에 몇 차례 참여한 후 노인들의 외침을 일종의 '인정투쟁'이라고 정리했다. 경제·사회·공간적으로 배제된 노인들이 본인들의 시대·가치관·문화가 말살된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버티려 한다는 것이다. 최 씨는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상실감을 표상한다"고 판단했다.

74세 독자에게 오아시스다방이 추억의 상징이듯 태극기를 든 70, 80대 노인들에겐 박정희 혹은 박근혜라는 인물이 추억의 표상일 수 있겠다. 올해 한 신문의 신년호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는데, 제목이 '굿바이, 박정희' '촛불은 묻는다, 우린 박정희와 이별할 수 있는가'다. 개인적으론 깊이 공감했으나, 추억으로 사는 노인에게 그 추억과 이별하라고 하는 건 가혹한 처사일 수 있겠다. '전쟁을 극복했던 자랑스러운 경험' '불굴의 의지로 일궈낸 산업화와 경제 발전의 신화'를 모두 잊으라고 강요하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다는 말이다.

그러잖아도 한국 노인의 삶은 고단하다. OECD 회원국 중 빈곤율이 1위, 자살률은 평균의 4배다. 살기 위해 아파트 경비를 서고 폐지를 줍는다. 노인 관련 통계는 주로 빈곤과 고령화 등 부정적 지표에 사용된다.

솔직히 태극기를 든 노인들의 주장에 동의하자거나 공감하자는 말은 차마 못 하겠다. 그래도 그들의 추억만큼은 인정하자고 제안한다. 촛불은 태극기의 추억을, 태극기는 촛불의 희망을. 서로가 동의할 수 없더라도 최소한 인정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게 소통의 출발점이지 않을까. 우리는 지역 갈등, 보혁 갈등보다 세대 갈등이 더 첨예해진 세상을 산다.

기획탐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