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미국 정부는 한국 정책검토위원회를 구성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한 뒤 사후 관리를 위한 대책회의인 셈이다. 당시의 회의 자료, 주한 미 대사관과 국무부 사이의 비밀문서는 2000건에 달했다. 위원회의 암호명은 체로키로 관련 문서를 체로키 파일이라 한다. 미국의 탐사 전문기자 팀 셔록은 자신이 취득한 파일을 지난달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기증했다. 권력의 공백 상태인 격동기 한국. 미국은 이를 어떻게 다뤘을까. 그 전모를 체로키 파일은 선명하게 보여준다.
'한국 측의 비상계엄에 반대해선 안 된다.' '한국 측은 질서회복을 위해 무력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단 두 문장만 봐도 다 보인다. 미국이 5·18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미국은 알지도, 관여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한데, 모두 거짓말이었다. 체로키란 암호명에서도 그들의 인식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체로키란 미국인에 학살당한 인디언 종족 중 하나. 그들이 보기에 한국은 이 체로키로 인식됐다.
지난달에는 5·18 때 일본 자위대의 한국 영해 침범을 시사하는 기밀문서가 공개됐다. '해상자위대는 한국 서남부지역 상황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미 태평양사령부의 교신 기록이다. 일본이 왜? 그렇게 묻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늘 그래왔다. 한반도에 균열이 생기면 일본은 어김없이 그 틈새를 노린다. 영해 침범? 유사시 군사 개입? 그것은 패턴화된 그들의 행동방식이다.
다시, 21세기 초반. 미중일의 한국 흔들기가 한창이다. 한국이 조롱박 신세가 된 것은 박근혜 정부의 결정 탓이다. 사드 배치 결정으로 한국은 미국의 제1 전선이 됐다. 중국의 사드 보복은 다들 익히 아는 사실. 드라마 공연 문화 분야, 중국인의 한국 관광, 화장품 등 상품 분야…. 대국과는 거리가 있는 좁쌀 대응이다. 정제되지 않은 원색적 비난은 내정 간섭에 해당된다.
트럼프 리스크는 또 다른 시험대. 산업과 통상, 환율 압력은 태풍 전야에 해당된다. 금리 인상에 미중 통화전쟁이 겹치면 대책이 없다. 그렇게까지야? 예단은 성급하지만 가시화될 경우 폭발성은 대단히 높다. 그 사이 일본은 또 틈을 비집는다.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합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후다닥 처리했다. 그러더니 서울 한복판에서 자위대 창설 기념식이라니? 이번엔 소녀상 문제로 주한 일본 대사를 소환해서는 함흥차사다.
하기야 남탓 하는 건 어설픈 버릇이다. 결국 문제의 초점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내적 역량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 지금 대한민국이 어디로 향하는지 누구 아는 사람? 물론 내일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긴 해도 뭔가 비전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탄핵 정국에, 대선 국면에 논의는 백가쟁명이지만 방향타는 보이지 않는다.
최순실 사태와 국회의 대통령 탄핵 결의가 바닥인가 했다. 한데, 그게 아니다. 과거의 청산, 미래의 건설은 뒷전이 돼 버렸다. 무엇이 잘못됐는지조차 혼미하다. 진영과 진영의 대결이 돼 버린 대선 국면은 그래서 더 갑갑하다. 번개가 잦으면 천둥이 치고 천둥이 치면 비가 오게 돼 있다. 내일은 오늘 속에 담겨 있는 셈이다. 오늘이 이리 지지부진해서야 어찌 내일을 기대할까.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중도하차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원 밖에서 세상을 구경하다 예상치 못한 환호에 상기됐다. 정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뒤 하차까지는 불과 3주. 애초에 나아갈 방향부터 흐리멍텅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간만 보다 만세를 불렀다. 바통을 받은 황교안 국무총리도 어금버금이다. 국정 실패의 책임, 대통령 권한대행의 책무는 일단 논외로 하자. 대선 출마의 선을 긋지 못하는 건 아쉬운 일이다. 할 거면 당장 하고, 말 것이면 안 한다 하면 될 것을. 반기문 총장을 닮은 애매모호한 행보는 나라에 도움이 안 된다.
그렇다고 야권이 썩 예뻐 보이지는 않는다. 적어도 대선 후보가 되려면 수치 놀음에서 벗어나 나라의 기틀을 어떻게 다시 세울지 고민이 보여야 한다. 지지율 몇 %에 일희일비해서야…. 개헌, 경제 민주화, 저성장, 실업률, 저출산 고령화 등 과제가 산적해 있다. 어떤 것이든 손해를 감수하는 후보가 필요하다.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비로 목욕할 각오 정도는 있어야지 않을까. 대선이 또 다른 갈등의 양산 과정이라면 답이 없다.
최순실 사태가 본격화된 지 100여 일이 지났다. 그 사이 우리가 얻은 건 무엇인가. 잃은 것은 수없이 많은데 얻은 것은 가물가물하다. 체로키 파일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수치 놀음에 혼을 빼앗기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 뭐가 달라지겠는가. 외교 안보 분야만이라도 일관된 방향을 찾아야 한다. 정권 교체기마다 오락가락해서는 영원히 체로키 파일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뿌리가 뽑혀 쓰러진 나무와 같다. 가로 누운 그 나무에는 절대로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누구 나무를 다시 세울 사람은 없는가.
논설고문 aiwi@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