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산하(再造山河)'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선의 해를 맞아 내놓은 사자성어다.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함락 소식을 듣고 실의에 빠져 있던 서애 류성룡에게 준 글귀로 '나라를 다시 만든다'는 뜻이다. 폐허가 된 나라를 다시 만들지 않으면 죽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던 충신들 마음처럼, 대한민국 대개조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마침 문 전 대표는 각 언론사 대선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를 하면서 이 사자성어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 이는 여권 분열과 야권 지지층 결집이란 탄핵 정국의 여파로 보인다. 당장 선거를 치른다면 당선은 떼어 놓은 당상 같은 분위기다. 그러니 '아직 대선은 시작도 안 됐다'는 견제구가 여기저기서 날아든다.

문 전 대표가 존경하는 지식인은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시류에 순응하지 않고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며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일궜다. 베트남의 영웅 호찌민이 머리맡에 그의 '목민심서'를 두고 부패 척결을 위해 공무원 필독서로 권장했다.

다산을 이야기할 때 개혁 군주 정조를 빼놓을 수 없다. 위당 정인보는 "정조는 다산이 있어 정조일 수 있었고, 다산은 정조가 있어 다산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마치 문 전 대표와 노무현 전 대통령 관계처럼.

여기선 명궁으로 소문난 정조가 부러뜨린 마지막 화살 이야기만 덧붙인다. 정조는 보통 한 번에 화살 5발씩 10번, 50발을 쐈다. 백발백중의 활 쏨씨를 자랑하는 정조는 마지막 화살은 꺾은 채 활쏘기를 마쳤다. 겸양의 미덕을 실천한 것이다. 최인호 소설 '상도'에 나오는 계영배의 의미 그대로다.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다.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이 낸 이른바 '문 대 비문' 보고서 때문이다. 개헌을 고리로 한 '제3지대' 구축을 경계하는 내용을 담은 이 보고서는 경선도 시작하기 전에 문 전 대표를 당 대선 후보로 기정사실화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문 전 대표는 지난 2일 '재조산하'를 다시 거론하며 "올해 대한민국은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가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대한민국 대개조 비전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나폴레옹이 말하지 않았나. '리더는 희망을 파는 상인'이라고. 비전 메이커, 문재인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 바탕은 인문학적 상상력과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민주주의 기본원리인 균형과 견제를 실현할 수 있는 협상력이다. 정권에 대한 도덕적 확신을 빼놓을 수 없다. 막스 베버가 제시한 정치 지도자의 세 가지 덕목인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과 다르지 않다.

촛불 민심은 대한민국의 문제와 대한민국이 갈 길을 백가쟁명식으로 쏟아냈다. 1000만 촛불을 이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광장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의 가치를 실천하며 내놓은 것이어서 의미가 자별하다. 꿈을 잃은 청년과 노년의 불안에 떠는 중장년에게 희망 사다리를 줘야 한다.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 깨끗한 지도자는 시대 정신이다. 적폐 청산, 남북 평화, 양극화와 청년 실업 해소, 성장과 분배 등 산적한 과제를 수렴한 그만의 비전을 내놓아야 한다.

그 전에 문 전 대표는 다 차려놓은 밥상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건네준 꼴인 지난 대선을 곱씹어 보고, 탄핵 정국에서 민심을 따라가기 급급했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가 뭔지 반성해야 한다. 급변하는 정국을 이끌 이슈를 선도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 자기 뜻을 덧붙이는 식이라면 곤란하다.

특히 문 전 대표가 인의 장막에 갇힌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털어낼 필요가 있다. 그의 주변 인사들이 벌써 무슨 장관, 무슨 장관을 자처한다는 지적이 언론에 제기된 지 오래다. 정치 지망생에게 친문 캠프는 너무나 높은 장벽이라는 소리도 나온다. 그 이유가 '나보다 잘난 사람을 새로 영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우스갯소리로 넘길 일이 아니다. 문 전 대표 스스로 정치적 신념을 명확히 하고 주변에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 수 있도록 품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문 전 대표가 최고로 꼽는 리더십이다. 세종은 경연을 통해 관료와 민심을 수렴하고, 유능한 관료들이 책임지고 일을 하도록 맡기며, 충분한 숙고의 시간을 거쳐 확정된 국정 과제를 흔들림 없이 추진했다. 한글 창제와 북방 영토 개척, 세제 개혁 등 세종의 업적은 그 결과다. 세종의 화법은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러나 …"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라는 정조와 달랐다. 박현모의 '세종처럼'과 '세종이라면'에 나오는 이야기다.

문 전 대표 좌우명은 '어려울수록 원칙으로 돌아가라'다. 지금 이에 '잘나갈수록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를 더하면 어떨까. 그 중심에 이런 장자(莊子)의 경구 하나를 더해. '虛室生白吉祥止止'. 마음을 비워야 지혜가 생기고, 분수를 지켜야 행복이 넘친다는 의미다. 대선이 머잖았다.

논설위원 jsdo@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