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닭들이 죽었다. 아니 죽였다. 어제까지 전국에서 2600만 마리의 닭과 오리가 생목숨을 빼앗겼다. 하루 평균 65만 마리꼴이다. 이런 확산세라면 5000만 마리가 살처분될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국내에서 키우는 닭이 1억6500만 마리라고 하니 최대 3분의 1이 사라진다는 얘기다. 암탉들의 처지는 더욱 위태롭다. 국내 전체 산란계의 26.9%가 도살 처분됐으며, 번식용 닭인 산란종계는 44.6%가 사라졌다. 당장 달걀 품귀도 문제지만 번식용 닭이 줄어 산란계로 키울 병아리가 줄어들면서 사태는 장기화할 수밖에 없다.
AI(조류인플루엔자) 사태는 재앙 수준이다. 인플루엔자는 밤안개처럼 농가에 소리 없이 스며들어 닭들을 병들게 했다. 지난달 16일 전남 해남과 충북 음성에서 고병원성(H5N6형) AI가 처음 발생한 이래 벌어지고 있는 닭들의 잔혹사다.
비슷한 조건의 일본은 어떨까. 일본에서 첫 번째 AI 확진 판정이 나온 건 지난달 말이었다. 일본은 최초 확인 2시간 만인 밤 11시에 총리 관저에 'AI 정보 연락실'을 설치하고 총리실 주도로 대응 체제를 가동했다. 아베 총리는 심야에 철저한 방역을 관련 부처에 지시했다. 다음 날 새벽 4시 자위대 대원들은 현장에 출동해 방역작업을 벌였고, 오전 9시 관계 부처 장관회의가 열렸다. AI 경보는 최고 단계인 3단계로 이미 발령된 상태였다. 이 모든 게 최초 확진 12시간 만에 이뤄진 전광석화 같은 조치였다. 일본에서 살처분된 가금류는 100만 마리다.
2600만 마리 대 100만 마리. 한국과 일본이 AI로 살처분한 가금류 숫자다.
한국 정부는 골든타임을 허비했다. 범정부 차원의 관계장관회의가 처음 열린 게 지난 12일이다. AI 확진 판정이 난 지 거의 한 달 만이다. 위기경보는 지난 16일에야 최고 단계인 '심각'으로 격상됐다. 이미 AI는 전국으로 확산된 뒤다. 황교안 총리는 AI 발생 열흘 뒤에야 방역 대책 상황실을 찾았다. 정부의 우왕좌왕에 일부 지자체도 뒤질세라 헛발질을 했다.
일본 AI는 비실비실하고 한국 AI는 독종이어서 우리 닭들만 멸종시키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한국 정부는 무능하고 무책임했다. 범정부 차원의 컨트롤타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농림축산식품부는 허둥지둥하고 공무원들은 무사안일했다. 오세을 양계협회장은 "한국 닭이 다 죽는데 지휘탑이 없다. 이게 나라냐"고 울부짖는다.
정부 존재에 의문을 제기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메르스 사태 때도 판박이였다. 첫 의심환자는 보건당국에 정밀검사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골든타임을 허비한 사이 바이러스는 통제선을 벗어나고 있었다. 책임지는 리더도 없었고, 그럴 만한 컨트롤타워도 없었다. 대통령은 이때도 2주 만에야 청와대 긴급회의를 개최해 뒷북을 쳤다. 당시 거리에는 세월호 참사에 빗대 "올해 목표 역시 살아남는 것이다"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제 목숨 알아서 건사해야 하는 각자도생은 우리의 운명이 돼 버렸다.
다시 한 해 전인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때 우리가 애타게 외친 건 "정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였다. 해운선사의 탐욕과 해피아의 방조가 빚은 사고였지만 배 안에 있던 304명 중 한 명도 못 살린 건 정부였다. 컨트롤타워가 없다 보니 골든타임을 속수무책으로 허비했다.
정점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있었다.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은 아직도 미궁이다. 그 시간 대통령이 올림머리를 할 게 아니라 눈을 부릅뜨고 육해공군과 해경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즉각 구출하라고 지시 한마디만 내렸더라도 이렇게 원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304명이 서서히 바닷속으로 가라 앉을 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있으나 마나였다.
도대체 왜 그럴까. 왜 우리 정부는 이토록 무능하고 제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 왜 공무원들은 납세자인 국민의 세금으로 녹봉을 받으면서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일까.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핵심은 국가 시스템을 붕괴시킨 것이다. 법적으로 따져서 국기와 국헌을 문란케 했다고 하지만 쉽게 얘기하자면 국가를 운영하는 시스템을 무너뜨린 것이다. 대통령에서 장차관을 거쳐 시장·도지사, 구청장·군수, 일선 동사무소 동장과 말단 9급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조직적으로 시스템에 따라 움직여야 할 대한민국이 '박근혜-청와대 문고리 3인방-최순실 라인'에서 주물럭거려졌다. 그게 엉망진창이 돼버린 현재의 이 나라다. 세월호와 메르스, AI, 독감 등으로 대한민국이 잊을 만하면 홍역을 치르고 국민이 목숨을 저당 잡힌 채 살아가는 이유다. 그런 국가 시스템 붕괴의 실상을 지난해 청와대 신년기자 회견장에서 보여줬다.
"대면 보고 그거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호호호." 이렇게 묻는 대통령과 겸연쩍게 웃는 청와대 수석과 각부 장관들. 절대 잊히지 않는 비극의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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