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 늦은 밤 가족들과 함께 재난 블록버스터 화제작인 '판도라'를 봤다. 세계 최대 원전 밀집지역을 배경으로 실감 나는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구성된 이야기 구조는 매우 설득력 있게 원전의 위험성과 가족의 소중함을 관객들에게 되새겨 주었다. 영화 시나리오는 2011년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1호기 폭발 사건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 최근 경주 지진과 잦은 사고를 통해 부산 울산 지역이 더는 지진과 원전 사고의 안전지대가 아닌 것이 밝혀지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관객은 영화의 허구성을 인지하면서도 다소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대부분 재난영화가 그렇듯이 판도라 역시 가족애를 통해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전반부가 사건의 배경 설명에 치중하고 있는 반면 후반부는 가족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희생하는 원전 기술자들의 헌신적인 활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감 나는 재난영화를 본 후에 어리둥절해 하는 아들의 손을 꼭 쥐어 잡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와중에도 눈물을 훔쳐내고 있는 아내의 충혈된 눈을 보면서 가족에 대한 소중함과 책임감이 떠올린 것은 수많은 관객 중에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필자는 15년 동안의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3년 전에 귀국했다. 아내와 두 아들의 한국 생활은 꼬박 2년을 채웠다. 단순 비교의 위험성을 감안하고 요약하자면, 미국의 일상생활은 이른바 '저녁이 있는 삶'이었다. 오후 5시 정시 퇴근은 당연하였고 저녁 회식이나 회의를 잡는 것은 가족과 마땅히 같이해야 할 저녁 식사를 방해하는 것이기에 허용되지 않았다. 반면, 한국에서는 각종 저녁 모임과 회식 때문에 일주일에 가족들과 저녁 식사 한 번 하는 것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결정적으로 한국과 미국 생활의 차이점은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삶의 질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부모는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하루 48분에 불과하다. 미국(211분)에 비해서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OECD 평균(151분)의 3분의 1수준이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지만 처음 6개월 동안 아빠가 한국에 와서 변했다는 아이들의 불만 섞인 눈초리와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아내의 핀잔은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 시점에서 느낀 것은 가족 행복을 위한 소통 훈련과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족은 물보다 진하다는 피로 연결된 숙명적인 관계로 여겨지며 구성원 간에 별도의 소통과 공감은 불필요하고 심지어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을 굳이 말로 해야 하느냐는 식이다. 사실 가정 내에서 가족 간의 소통 훈련과 자발적인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가족은 우리 사회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단위이며 다수의 가족 커뮤니케이션 연구는 가족 구성원 간의 대화 정도와 행복감이 상호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화를 통한 일상의 공유와 감성적 교류는 가족 행복의 핵심적인 요소란 말이다. 나아가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의 자존감이 더욱 높고 자아 성취감과 사회적 효능감을 더욱 발휘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우리가 처한 구조적 현실은 녹록지 않다.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인 생활시간 조사'에 따르면 우리는 독일인들보다 1년에 무려 4개월 더 일하고 있으며 청소년들은 과도한 학업 부담 때문에 하루 6시간도 못 자 고질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경쟁적인 사회 시스템 아래 하루하루 생존의 곡예를 타고 있는 현실에서 가족 울타리의 행복을 기대하는 것이 과연 사치에 불과한 것인가.

그야말로 어느 해보다 다사다난했던 병신년의 마지막에 다다랐다. 최근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은 오히려 자괴감을 부추기고 있으며 근거 없는 미래의 희망만을 꿈꾸기에는 너무 비루한 상황이다. 우리 국민이 목도하고 있는 작금의 어처구니없는 정치 사회적 현실은 영화적 상상력을 오히려 능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밑 무렵 우리가 가족들의 얼굴을 찬찬히 마주 보며 서로 격려하고 사랑할 여유마저 가질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족은 우리 각자 존재 이유의 근원이자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가족 행복을 위해 어색하더라도 소통 훈련과 계획을 세워보는 것도 연말연시에 보람 있는 일이다. 대화를 통한 가족 소통은 나부터 시도해 보고 정유년 새해부터는 한 달에 한 번 가족회의 개최하는 것을 제안해 보자. 사랑하는 가족의 웃음과 행복을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동아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