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비자금'을 폭로한 김용철 씨가 2010년 '삼성을 생각한다'는 책을 펴냈을 때 엉뚱한 사람이 주목을 받았다. 삼성의 공연 요청을 거절한 가수 나훈아 씨다. 이건희 회장 일가의 파티에 초청되는 가수는 보통 2, 3곡을 부르고 3000만 원쯤 받았다. 그런데 유독 나 씨는 삼성이 아무리 많은 돈을 주겠다고 해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나는 대중예술가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 표를 사라'는 취지였다고 김 씨는 설명했다.
김 씨는 2007년 10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해 삼성 비자금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 출신인 그는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끝으로 퇴사할 때까지 7년가량 삼성에 몸담았다. 김 씨의 폭로는 삼성특검으로 이어졌고, 이듬해인 2008년 4월 삼성은 경영쇄신안을 내놓았다. 이 회장 퇴진과 인적 쇄신, 전략기획실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 전략기획실 후신인 미래전략실이 국회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특위' 청문회에서 60년 역사의 기로에 섰다. 증인으로 출석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국민의 부정적 인식이 있는 삼성 미래전략실을 없애겠다'고 밝힌 것. 미래전략실이 정경유착과 이 부회장 그룹 승계 작업의 핵심 고리 아니냐는 의구심에 대한 대답이다.
미래전략실은 1959년 회장실 직속 비서실로 출발해 1998년 구조조정본부, 2006년 전략기획실을 거쳐 '삼성그룹의 실질적 의사결정기구'라는 지적을 받는 핵심 조직. 이 회장이 전략기획실을 전격 해체했으나 슬그머니 되살아나 지금까지 건재했던 이유다.
이 부회장은 청문회에서 "모르겠다·죄송하다·지켜봐달라"는 말로 핵심을 비껴가다 '돌려막기 재용', 그것도 '사지선다형 돌려막기 재용'이라는 비아냥을 자초했다. 외신은 '삼성의 억만장자 후계자에겐 최악의 날이었을 것'이라고 썼다.
그런 이 부회장이 작심한 듯 내놓은 것이 미래전략실 폐지 방침이다. 앞서 이 회장이 약속을 뒤집었으니, 단순히 궁지를 벗어나려는 의도였다면 양치기 삼성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2008년 4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삼성 경영쇄신안을 두고 내놓은 성명은 오늘도 유효하다. "삼성 최고 경영인들은 자신의 과오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막연히 용서를 구했다. 모든 죄의 근원인 불법 승계를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떤 쇄신안도 병폐를 단절하는 개혁안이 될 수 없다."
정상도 논설위원 jsdo@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