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만 아니었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처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애정이든 연민이든 혹은 그를 지지했던 정치적 행위를 부정하는 데 대한 인지부조화 때문이든 대통령이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 요지다. 멀쩡한 대통령이 최 씨 패밀리에게 휘둘려 그렇게 됐다는 주장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해결방법도 간단하다. 최 씨 일당만 잡아들여 감옥에 집어넣으면 끝날 일이다. 시민들이 차가운 눈비를 맞으며 박근혜 하야를 목 터지게 외치지도, 국회에서 탄핵이니 퇴진이니를 주장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전직 국회의장과 국무총리 등 정·관계 원로들까지 모여 내년 4월 하야를 요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적은 박근혜다. 탄핵이냐 하야냐 갈림길에 서게 된 현 위기의 본질은 바로 박 대통령 자신에게 있다.
나뭇잎이 뒹구는 것만 봐도 깔깔거리며 친구들과 뛰어놀아야 할 열두 살 때 청와대에 들어가 18년간을 철권통치자의 딸로 살았던 박근혜. 그때 국민은 '영애님'으로 불렀지만, 그는 '공주'였다. 게다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권력의 단맛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20대 미혼 여성이 전국을 다니면서 갓 쓴 노인들 앞에서 윤리 도덕을 말하고, 손짓 눈짓 하나로 재벌과 조직, 돈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안다. 열두 살에서 서른 살까지 18년이란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한 인간이 보편적이며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키우고 배우며, 소양과 지식을 쌓는 황금기란 걸. 그는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청와대를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거의 혼자서 18년간 방 안에서 요가를 하며 와신상담 버텼다.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그러다 덜컥 대통령이 됐다. 그가 어떤 능력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유권자들은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단지 '부모 없는 불쌍한 박근혜'를 지켜줘야 하고 결혼을 안 했으니 부정부패와 권력 비리는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국민은 '대통령'을 뽑았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여왕'이 됐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세습 군주'라고도 했다.
박 대통령이 1998년 초선 국회의원으로 정치권에 들어온 이래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진 현재까지 그의 언행은 이해할 수 없는 것 천지였다. 상식적인 사고나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일들이었다. 숨어있던 퍼즐 한 조각인 최순실을 끼워 넣었더니 전체 그림이 드러났다고들 한다. 그런데 최 씨 부녀가 이권을 챙기고 국정을 농락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나이가 65세가 되도록 40년 동안이나 농락당한 박 대통령은 어떻게 된 사람이냐는 물음에는 답이 막힌다. 이 나라 65세 아줌마들이 얼마나 강인하고 세상물정에 도통했는지는 엄마들만 봐도 안다.
소신과 원칙의 정치인은 박 대통령의 상징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지켜본 사촌 형부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버지 어머니 말도 안 듣는 엄청난 고집쟁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저 혼자만 똑똑하고 나머지는 다 병신들' '정상에 앉아서 모두 형편없는 사람들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김 전 총리가 '최태민이란 반 미친놈에게 반 미쳐 박근혜는 천하가 제 손아귀에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에 해답이 들어 있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 자리를 왕좌로 여겼던 것 같다. 왕은 수고스럽게 머리나 팔다리를 쓸 일이 없다. 내시를 통해 시키면 된다. 박 대통령도 그랬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 전여옥 대변인이 그의 비옷 모자를 씌워주는 사진이 화제가 됐다. 비가 오자 모두 비옷을 뒤집어썼는데 그만 누군가 씌워줄 때까지 비를 맞고 기다렸다. 전여옥은 "박근혜에게 한나라당은 '나의 당', 한국은 아버지가 만든 '나의 나라', 국민은 아버지가 긍휼히 여긴 '나의 국민', 청와대는 '나의 집', 그리고 대통령은 '가업'"이란 어록을 남겼다.
대통령이 국가의 공적 책무를 국민으로부터 한시적으로 위임받은 최고 공직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그에겐 없는 것 같다. 민주공화국에 대한 철학 자체가 없는 게 아닌가 싶다. 오히려 왕정 스타일에 가깝다. 장관으로부터 대면보고를 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도, 청와대 수석들이 독대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다. 최순실과 문고리 3인방 등 비선 실세들만 총애하면서 나라를 내맡긴 건 왕정 시대 무능한 왕 노릇과 비슷하다.
나는 박 대통령이 지금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고 확신한다. 대국민 담화에서 밝힌 사과 역시 결코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검찰의 수사결과 부정과 대면조사 거부 등을 보면 자신의 행위가 뭐가 잘못이냐는 투다. 국정 농단이 아니라 '짐이 곧 나라'라고 생각하는 왕의 통치행위일 뿐이다. 그 고통은 대한민국과 국민이 모두 떠안고 지금 신음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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