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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20대 초반까지, 나에게 '어머니'를 떠올리는 일은 우울하고 깊은 좌절감을 맛보게 했다. 누구도 정확히 일러주지 않는 가정사를 등에 업은 큰딸로 자라는 것은 숨을 쉬거나 눈을 깜박이거나, 허리 한쪽 어느 뭉텅이로 묵직한 통증을 달고 사는 것과 같았다. 다섯 살에 헤어졌다는 나의 친부모는 '일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다'라는 이야기를 전혀 해주지 않아서, 눈 뜨고 보니 어머니의 젖가슴을 잃고, 눈 뜨고 보니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다정하고 속 깊은 새어머니가 살뜰히 챙기지 않았다면 크게 엇나갈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친한 친구도 없고 고무줄놀이나 공기놀이에 재능도 지독히 없었던 어린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오직 아버지의 서재뿐이었다. 거실을 뺑 둘러 낡은 책장을 칸칸이 끼워 넣은 아버지의 서재는 독립되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가족들의 생활공간과 맞닿아 있어 언제라도 한 권쯤 골라 읽기 좋았다. 아버지가 평생 중고 책방에서 사 모은 천 여 권의 책들엔 장르나 경계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낡은 종이 냄새와 새어머니가 맛나게 끓인 김치찌개 냄새가 뒤섞인 거실 한구석에서 나는 마음 가는 대로 책을 골랐다. 버지니아 울프와, 실비아 플라스와, 체홉과, 크로닌과, 엔도 슈사쿠를 차례로 만나는 소녀시절을 보내면서도, 나는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 작가인지 몰랐다. 좀 더 자라서는 열두 권의 양장본으로 된 세계명화전집을 그림책처럼 보고, 책장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고전 영화 ost lp 세트를 꺼내 턴테이블로 들었다. 책과 레코드와 습작노트밖에 없는 10대를 보내면서도 나는 늘 얼굴을 알 수 없는 어머니가 궁금했다. 아버지의 책장은 출구가 없는 미로 같아서, 상실한 존재에 어떤 답을 얻었다 싶으면 곧바로 명멸하는 불빛이 되었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책장 어디에서도 내 어머니가 누군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새어머니가 늘상 풍기는 좋은 냄새와 다정한 눈빛에서 아마 나의 친모도 저러하리란 추측을 거듭할 뿐이었다.
스무 살이 넘어 친어머니를 만난 것은 갑작스러웠지만 한편 자연스러웠다. 남포동 대형 커피숍의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는 내 어머니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미리 약속하고 만난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터졌다. 보고 싶었다느니, 항상 궁금했다느니 하는 말은 의외로 서로 오가지 않았고, 우리는 그저 울기만 했다. 눈물을 찍어내며 띄엄띄엄 근황을 전하면서도 우리는 서로가 무척 닮았다는 것에 놀랐다. 어머니와 나는 아메리카노보다 믹스커피를 좋아했고, 한식보다 분식을 좋아했고, 이브생로랑을 좋아했고, 목소리와 말투와 쓰는 단어까지 비슷했다. 평생을 떨어져 살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쌍둥이처럼 닮은 모녀는 곧 해답을 찾았다.
- 엄마는 소녀 시절에 뭘 좋아했어요?
- 실비아 플러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영화와 그림도 좋아했어.
- 어머, 정말요?
- 그럼, 네 아빠랑 헤어질 때 내 책을 몽땅 두고 나왔어.
아버지의 서재엔 어머니의 책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손길이 닿았던 책들을 찾아냈고, 반복해서 읽고, 나름의 상상과 꿈을 더했다. 몇십 년 전의 어느 소녀가 그랬듯, 자식을 떼어놓고 멀리 떠나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여자가 그랬듯이 말이다. 나는 어머니가 누구인지 평생 찾아 헤맸지만, 사실 어머니와 늘 만나고 있었다. 어머니가 남겨두고 간 책들은 나에게 지도가 되었다.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나는 단서를 하나하나 조합해가며 어머니에게로 가는 길을 찾아왔던 셈이다. 우리는 같은 레코드를 들었고, 같은 구절에 줄을 쳤다. 비슷한 습작 노트도 가지고 있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어머니의 그림자를 찾아냈고, 쏙 빼닮은 핏줄로 자라났다.
다시 이십 년이 지난 지금, 어머니의 책과 레코드들은 내 서재로 이사를 와 있다. 어머니가 나에게 남긴 것들을 찬찬히 더듬다 보면 다시 내 삶을 살아갈 지도가 보인다. 이제 내 거실을 채운 책들 사이로, 소녀 두 명이 키득거리며 책 한 권을 나눠 읽는 환영을 가끔 보곤 한다. 핏줄의 유산이란 이런 것일까. 미스테리했던 내 삶의 단서를 주워 모아, 나는 또 다른 지도를 그리고 있다. 그 지도는 또 누가 펼쳐볼 것인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