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경남 진주시 대평면이다. 그런데 태어나서 자란 곳은 부산이다. 대평면에서 실제 살아본 적은 없다. 묘사 등 집안 행사 때 다녀온 것이 전부다. 그것도 마지막으로 간 게 10년이 더 됐다. 이제는 마음의 고향이라고 말하기도 좀 멋쩍을 정도가 됐다. 그래도 고향을 물으면 대평면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진주 출신이라는 걸 가슴 뿌듯해한다.
살아본 적 없는 고향에 애착을 갖게 된 데는 가정 교육의 영향이 크다. 어릴 때 부모님은 대평면이 고향이라고 가르쳤다. 부모님에게 부산은 객지였고, 경남은 언젠가는 돌아갈 고향이었다. 사실 고향 마을은 남강댐 건설로 생긴 인공호수인 진양호 속으로 대부분 사라졌다. 친·인척들은 부산이나 서울로 이주했다. 지금은 친인척 몇 가구와 선산만이 있을 뿐이다. 돌아갈 고향이 사라졌으니 부모님의 애틋함은 더했는지도 모른다. 고향의 사전적인 의미가 '태어나 자라난 곳 또는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이라고 돼 있으니, 부모님의 고향관이 딱히 틀린 것은 아니다.
이런 고향 의식은 부산이라는 도시의 특성 때문에 생겨난 측면도 있다. 부산은 지역적인 특성상 다른 지역처럼 동향의식이 강하지 않다. 도시 형성의 과정부터가 그렇다. 부산은 8도 출신이 모여들어 만들어진 대도시이다. 하나의 향토색으로 뭉칠 만한 지역적인 토대가 약하다. 경남과 부산 출신 사이에 동향 의식이 약한 것도 이런 이유가 작용한 듯하다. 같은 영남권이지만, 동향 의식이 남 다른 대구 경북 출신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이런 정서 탓에 집은 부산인데, 고향은 경남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다 보니, 고향을 바라보는 눈의 각도가 바뀔 수밖에. 요즘은 가족이나 집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삶의 중심인 세상이다. 고향 역시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보다는, 자신이 태어나 자라난 곳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오십 평생 간직한 고향관이 이런 시대 변화의 도전(?)을 받은 것은 꽤 됐다. 15년 전, 마흔 즈음이었다. 난생 처음 서울 생활을 할 때였다. 진짜 객지 생활이었다. 객지에서 만난 비슷한 말투의 사람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알았다. 경상도 말이 다 똑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지금 딛고 사는 곳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게 현실이란 사실을. 개인 의지와는 무관했다.
당시 부산과 경남은 각종 현안으로 사사건건 대립했다. 부산 강서구 범방동과 김해 수유리 일대 조성된 부산경남경마공원(현 렛츠런파크 부산경남) 유치전, 강서구 가덕도와 진해 일대에 건설된 부산항 신항의 명칭 갈등, 남강댐 물의 부산 공급 논란 등등. 최근에는 신공항 입지 문제까지 두 시·도의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엇갈렸다. 그 속에서 집은 부산인데, 고향은 경남이라는 주장이 먹혀들 수가 없었다. 밥그릇 다툼이 벌어질 때는 양다리 걸치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이런 경남과 부산의 갈등을 해소하자며 나온 게 '동남권 상생(相生)'이었다. 부산 울산 경남의 뿌리가 경남으로 하나인 만큼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상생이라는 게 애향심만으로 될 일은 아니었다. 동생(부산 울산)이 분가하면서 큰집(경남) 재산을 가져 간다는 피해의식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우리가 남이가"라고 소리쳐도 소용 없는 일이다. 지역균형발전 역시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보는 게 달랐다. 부산은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수도권과 맞서기 위해 경남이 힘을 보태주길 원했다. 하지만 경남은 부산만큼의 균형발전을 정부에 요구했다.
상황은 지금도 비슷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밥그릇'이었다. 뭉치는 게 더 따뜻한 밥을 보장한다는 '발전 시스템'을 제시하지 못하면 상생이라는 구호는 공허하기만 하다. 서로 밥을 더 가져가려고 경쟁하는데, 인정에 호소하는 것이 무슨 효력이 있겠는가. 이런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그동안 많은 연구가 있었다. 동남권 상생을 위한 대안도 여럿 제시됐다. 부울경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동남권광역경제권이 대표적이다. 동남권 인구 800만 명을 엮어내는 규모의 경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논리이다.
그래서 성과물이 중요해 보인다. 준 게 있으니 받는 게 있고, 협력하니 시너지 효과가 있다는 것을 시·도민이 피부로 느끼면 동질감이 좀 생기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최근 논란인 경남도의 지리산댐 물 부산 울산 공급 계획이 주목된다. 동남권 상생의 중요한 시험대로 여겨진다. 받는 부산과 울산은 환영하는데, 주려는 경남의 지역 주민 반발은 거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잘만 해결하면 상생이 헛구호만 아니게 된다.
이제 경남이 화두를 꺼냈으니 부산과 울산이 답할 차례다. 무엇으로 보답할지. 홍준표 경남도지사와 서병수 부산시장, 김기현 울산시장의 리더십이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남취재본부장 sbjun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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