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민주화 이후 발전하던 한국의 민주주의가 쇠퇴했다고 한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절감한 평가다. 쉽게 말하면 대통령 잘못 뽑은 자괴감에서 비롯된 평이다. 그러나 시민의 민주주의 의식도 쇠퇴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대중의 민주주의 감각은 몰라보게 성장하였다. 지금 이 나라 국민은 세상 어디에도 볼 수 없는 평화롭고 창의적인 시위를 펼치고 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르신까지 거의 모든 세대, 계층이 광장에서 함께 촛불을 드는 것도 놀랍지만, 이들이 들려주는 말과 보여주는 몸짓은 거의 예술에 가깝다. 요컨대 시민의 예술적 시위가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해 세상을 바꾸고 있는 역사적 현장을 지나고 있다. 여기서 한국 민주주의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이렇듯 수준 높은 정치적 의사 표현 능력은 이미 다양한 분야에 확산되고 있는데, 평화의 소녀상 건립활동이 주목된다. 소녀상은 1991년 시작한 일본군 강제 성노예 피해 할머니의 수요 집회가 1000회째가 된 것을 기념하여 2011년에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세워졌다. 부부 조각가가 만든 소녀상은 우선 광화문 광장에 있는 세종대왕상, 이순신동상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130㎝에 불과한 키에다 여리기 짝이 없는 소녀의 모습은 전혀 위압적이지 않다. 동상을 세워놓은 단도 거의 없다. 그런데도 조각상의 의미는 간단치 않다.
무엇보다 소녀상은 기억과 치유를 위한 것이다. 이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세운 기억의 동상이다. 국가가 기억하지 않으려는 진실을 시민들이 나서서 밝히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는 할머니들의 고통과 아픔을 이들만의 것으로 방치하지 않고 함께 치유하기 위해 내디딘 첫걸음이다. 또한 소녀상은 정식 이름대로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2011년 처음 세운 후 전국 곳곳과 미국 일본 호주 중국 등 30여 곳에서 시민들이 추진하고 해당 지자체가 도우면서 지속적으로 건립하고 있다. 지금도 유럽 등에서 건립을 추진하고 있듯, 평화를 바라는 모든 이의 마음은 이렇게 기억과 고통을 공유하며 거대한 물결을 만들고 있다.
소녀상에 담긴 빼놓을 수 없는 의미는 '일본을 향한 항의와 사죄 요구'다. 일본은 식민지 시기 피해자의 인권을 짓밟는 범죄행위를 했음에도 지금까지 조금의 뉘우침도 없었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간 우리 정부의 무대책이다. 한일 양국 어느 정부도 할머니들의 그 고통스러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소녀상이 세워지면서 전혀 이 문제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우선 여전히 사죄하지 않고 있지만, 꿈쩍 않던 일본을 자극하여 반응하게 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그간 시종일관 무시하던 것에서 진일보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한국 정부가 줏대 없이 일본의 의도에 말려들어 일을 그르치고 있다는 점이다. 할머니들이 직접 일본에 항의하고 사과를 받으려는 30여 년의 노력을 정부가 나서서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외무부 장관이 일본 성노예 문제에 합의한 내용의 핵심은 할머니들 치유를 위한 재단 설립에 10억 엔을 낼 터이니 이로써 사과한 것으로 하고, 소녀상도 이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에도 피해 할머니들에 대해 직접 표명한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죄는 없다. 한국 정부는 이에 더해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해 위로금 명목으로 돈을 들고 할머니들을 찾아다니며 괴롭히고 있다. 이러는 사이 난국을 틈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속전속결로 가서명까지 한 것을 보면, 이러려고 할머니들을 배제한 채 서둘러 합의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지금 이를 제어할 힘은 오직 국민에게 있다. 부산에서도 청년과 시민단체가 주축이 되어 초량 일본영사관 앞에 소녀상을 건립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해당 지자체가 일을 지지부진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의 훼방이 어찌 일본의 소녀상 이전 요구, 이에 끌려다닌 무능한 정부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머나먼 미국에는 지방정부가 나서서 소녀상을 건립한 곳도 있다. 해당 지자체는 소녀상 건립을 도로교통법과 같은 하찮은 문제로 본질을 흐려서는 결코 안 된다.
소녀상이 늘어날수록 미사일은 줄어들고, 사드는 더더욱 필요 없을 것이다. 촛불이 민주주의를 바꾸고 있다면, 소녀상은 평화를 만들고 있다. 지자체는 할머니와 시민들의 염원에 재를 뿌려, 시청 구청 앞으로 촛불을 모이게 할 것인가.
경성대 인문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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