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스톰이 몰려오고 있는데 엔진이 고장 난 조각배에 선장도 구명정도 보이지 않는 형국'.

최근 '2017 트렌드 코리아'를 발표한 서울대 김난도 교수는 내년 한국 사회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김 교수의 말처럼 내년은 미국 대선 이후와 중국의 저성장, 대통령 선거 등 대내적 위기에 북핵 위협, 기업 구조조정 등 악재로 둘러싸여 있다. 김 교수가 제시한 트렌드 중 가장 눈에 띄는 게 '각자도생(各自圖生)'이었다. 믿을 건 나밖에 없는 세상, 어떻게든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내년에도 이어진다는 뜻이다.

제각기 살아날 방법을 도모한다는 이 말은 2014년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지진사태를 겪으면서 어느새 우리에게 익숙한 사자성어가 됐다. 국민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알리지 않는 비밀주의와 무능함이 국민의 공포와 불안을 불러왔고 정부를 불신하게 됐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지목되고 있는 최순실 씨의 국정 농단 전횡을 보면 분노와 불신을 넘어 집단 우울증에 걸린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권력의 막후 실세였던 최 씨가 구속되고 박근혜 대통령이 두 차례 사과했지만 격앙된 민심은 진정되지 않고 있다.

문득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 8월 광복절 기념사가 떠올랐다. 박 대통령은 당시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며 "자기비하와 비관, 불신과 증오는 결코 변화와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없다"고 언급했다. 이른바 '헬조선'이라는 유행어를 반박했다. 하지만 '최순실 사태' 이후 드러난 총체적인 부정을 보면 말문이 막힌다.

대한민국의 대기업은 최 씨의 딸 정유라 씨에게 승마에 쓰라고 35억 원을 바쳤다. 또 정 씨는 대학에 부정 입학하고 학사관리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정 씨는 2년 전 "돈도 실력이야.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는 글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평생을 저축해도 집 한 채 제대로 장만할 수 없는 흙수저 젊은이들은 절망스럽기만 하다. 지식과 정의를 구현하는 상아탑인 대학에서 공정성이 사라지면서 대학생들은 분노와 허탈감에 빠져 있다.

헬스 트레이너로 일하다 청와대 3급 행정관이 된 윤전추(36) 행정관과 유도선수 출신으로 4급으로 발탁된 이영선(37) 전 행정관 등을 보면서 공시생들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3급까지 올라가려면 평균 30~40년이 소요되는 데 이들은 최 씨의 후광을 업고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탄 셈이다.

국민이 맡긴 권력을 지인에게 넘긴 대통령과 그 뒤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한 이들의 행태는 우리 국민에게 큰 무력감을 안기고 있다. 우리는 국민이 뽑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 노릇을 했다는 사실에 충격에 빠졌고 원칙이 무너진 사회를 보며 국가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됐다.

지난 6일 검찰에 소환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행태는 국민적 분노를 부채질했다. 팔짱을 끼고 있는 우 전 수석과 그 앞에서 가지런히 손을 모은 채 서 있는 검찰 직원과 수사관의 모습을 보면서 수사의 공정성에 의문이 들 뿐이다.

국민적 분노는 이제 우울증과 같은 증상의 '순실증'이란 신조어로 표현되고 있다. 박 대통령이 담화 도중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으로 괴롭기만 하다"는 발언을 한 이후 "내가 이러려고 세금 냈나" "내가 이러려고 공부했나" 등 좌절과 분노가 섞인 패러디도 양산되고 있다.

하루가 지나면 또 밝혀지는 '최순실 국정농단' 뉴스에 더는 국가를 믿기보다는 내 살길은 내가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각자도생은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 능력 상실과 공동체 붕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각자도생을 추구하는 경쟁사회에서 최대 피해자는 사회적 약자들임이 자명하다. 개인의 힘은 약하지만 모두가 하나의 목소리를 낼 때 그 힘은 파괴적일 것이다. 나라를 이끌어 갈 리더십과 정부시스템이 흔들리고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함께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정치인들은 상처받은 국민을 위로하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법적 조치 등 정의를 제대로 실현해나가는 길뿐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독자여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