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태풍 '매미' 때 부산 강서구 녹산산업단지는 직격탄을 맞았다. 해안을 휩쓸고 들어온 바닷물에 산단 일대가 온통 물바다로 변했다. 피해액만 600억 원이 넘었다. 녹산산단의 이런 재해는 이미 예고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산단이 바닷가에 바로 인접해 있는데도, 해안 완충 녹지대의 너비를 당초 설계안인 100m에서 20m로 대폭 축소해 만들어 놨으니 말이다.

돈이 안 되는 완충지대를 무지막지하게 줄이고 그 면적에 공장을 분양하는 땅장사에 급급했으니 입주업체들의 안전과 방재를 소홀히 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 건 당연했다. 태풍 피해 이후에서야 방파제와 완충지대 확대를 추진하느라 야단법석을 떨었다.

지난 5일 태풍 '차바'로 아수라장이 됐던 부산의 대표적 부촌 해운대 마린시티도 이와 닮은꼴이다. 바다에서 불과 30~40m 떨어진 이 지역은 태풍이 올 때마다 물난리를 겪었다. 견디다 못해 높이 3.2m 규모의 방수벽 조성이 추진됐다. 하지만 바다가 안 보인다는 일부 주민과 상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1.2m로 낮춰 만들어졌다. 녹산산단의 뼈아픈 교훈을 잊어버린 채 해일 피해의 악몽을 되풀이한 셈이다. 어쩌면 4m도 모자랄 판에 고작 성인 허리 정도의 1.2m 방수벽은 거대한 파도 앞에 그야말로 무용지물이었다.

마린시티의 방수벽이 턱없이 낮아진 이유가 알려지면서 안전보다 조망권을 우선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관할 행정기관의 무사안일하고 소극적인 행정도 도마에 올랐다. 게다가 이번 태풍 후 마린시티 앞바다에 방파제를 설치하는 뒷북치기 행정을 놓고 말이 많다.

부산시는 지난 10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에 이곳 방재대책으로 총사업비 700억 원 중 절반을 국비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길이 650m 방파제와 690m 호안을 설치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막대한 예산도 그렇거니와 혈세를 특정지역에 또 쏟아붓는 게 과연 온당한가라는 의문이 든다. 공유수면 매립지인 마린시티 지역에 애초부터 해안 완충지대를 충분히 확보했더라면 연례행사 같은 재앙은 없었을 터이다. 바다를 메워서 그 개발이익을 누린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이제 와서 국·시비로 방재예산을 충당한다는 것을 좋게 볼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문제는 이처럼 방파제를 조성한다고 해도 해일 피해가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기후변화와 폭풍 해일 등을 감안하면 바닷가 코앞에 주상복합건물 같은 시설물을 짓는 것은 이제부터라도 엄격히 규제하는 게 옳다. 더욱이 워터프런트, 즉 수변공간은 특정 계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민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공공재(公共財)라는 인식을 가져야 하겠다.

해외 선진 도시들을 보면, 바닷가에 초고층 건물과 주거시설이 숲을 이루고 벨트처럼 이어진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9년 전, 오대호를 낀 시카고에 갔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수변에서 육지로 수백m 떨어진 지역부터 빌딩들이 조성돼 있는 모습이었다. 반면 부산의 웬만한 해안은 해수욕장 일대 등을 제외하고는 주거상업시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무분별한 해안 난개발이 태풍 해일 피해의 화를 자초하는 것이다.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사례는 캐나다 동쪽 연안의 핼리팩스다. 이 도시는 2003년 초속 45m 강풍의 허리케인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자 해안 난개발 행위를 원천봉쇄하고 나섰다. 재해 예방을 모든 행정의 중심에 두고 도시기반시설과 부동산 이용계획의 기본틀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예를 들어 바다와 가까운 건물의 1층에는 주거시설이 들어설 수 없도록 규정했고, 건축물 설계 단계에서부터 기후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과 폭풍에 대비한 방지책을 반드시 제시하도록 만들었다.

근래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 추세로 볼 때, 슈퍼 태풍과 같은 기상이변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를 감안하지 않고 해안에 각종 건축물을 무분별하게 짓도록 내버려두는 건 재해를 잉태하는 것이다. 수변공간의 특성을 외면한 난개발은 자연경관 훼손뿐 아니라 재해 발생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특히 부산은 기후변화에 아주 취약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4년 전 국립환경연구원의 평가에서 부산은 홍수나 물관리, 재해, 해수면 상승 등 여러 측면에서 취약성이 지적된 바 있다.

태풍 '차바'로 인한 피해 복구활동이 아직도 진행 중이다. 완전한 회복에는 시일이 꽤 오래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런 피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도시 인프라와 방재시스템에 대한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시설 계획·설계단계부터 기후변화와 재해 예방을 철저히 감안하고 반영해야 하겠다. 물론 천재지변이나 불가항력적 자연재해를 막는다는 건 사실상 힘든 일이다. 하지만 마구잡이식 개발을 없애고 안전을 최우선 한다면 녹산산단과 마린시티에서와 같은 수해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을 해마다 반복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편집국 선임기자 겸 걷고싶은 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