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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 칼럼] 노비의 나라, 흙수저의 나라

목숨바쳐 지킬 것 없는 노비가 인구의 반…임란 패배는 '필연'

금수저가 절대다수 흙수저를 지배하는 나라는 가망이 없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6-10-13 18:56:40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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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상속제도는 '경국대전' 형전(刑典) '사천(私賤)' 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여기서 사천이란 개인이 소유하는 노비(奴婢)를 말한다. 조선의 상속제는 대체로 균분상속이 원칙이다.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고,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결혼을 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따지지 않고 재산을 공평하게 갈라준다. 물론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 적처(嫡妻)의 자식인가, 첩의 자식인가에 따라 상속비율이 조금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동일한 조건이라면 대체로 똑같이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딸보다 아들에게, 차남 이하보다 장남에게 훨씬 더 많이 주는 불균등 상속제는 조선 후기에 생긴 것이다.
'경국대전'을 읽은 것은 스물여덟 때다. 불균등 상속제만 알고 있던 나에게 조선 전기의 균분상속제는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더 충격적인 것은 상속의 예가 노비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어떤 경우에는 노비를 몇 명 더 주고, 어떤 경우에는 노비를 몇 명 덜 준다는 식으로 상속의 예가 제시되어 있었다. 나는 막연히 '경국대전' 형전 사천 조를 읽을 때까지 조선시대는 농업사회였기에 재산은 대부분 토지로 이루어져 있고, 상속 역시 당연히 토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국대전'은 노비를 예로 들어 상속제를 설명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더 중요한 재산은 토지가 아니라 노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사회에 노비가 얼마나 있었을까? '경국대전'을 읽고 얼마 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를 보다가 아주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성현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 인구는 절반이 노비다. 그러므로 이름난 고을이나 큰 읍(邑)이라 해도 군졸의 수가 아주 적다." '경국대전'이 완성된 것은 성종 때이고, 성현은 또 성종 때 활동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용재총화'의 노비가 인구의 절반이라는 말은 '경국대전' 성립 때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인구의 절반이 노비이기 때문에 이름난 고을도 큰 읍도 군졸이 적다는 말은 음미할 만하다. 곧 노비는 군인이 될 수 없었다. 왜 노비가 군사가 될 수 없었던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노비의 경우 사람의 권리를 누리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 사람의 사유재산이기 때문이다. 사유재산을 내놓아 군졸로 만들려는 주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또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없는 노비가 무슨 지킬 것이 있어서 전쟁에 자기 목숨을 바치겠는가. 노비가 전쟁터에 나간다든지, 아니면 먼 곳에 있는 복무지로 갈 경우, 달아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는가? 이것이 아마도 노비가 군졸이 될 수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인구의 절반이 노비라는 성현의 말은 과연 사실인가. 오늘날 연구에 의하면, 조선 전기 사노비의 수는 대체로 전 인구의 40~50%를, 조선 중기에는 30~50% 정도를 차지했다고 한다. '용재총화'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이다. 사실 조선 사족체제의 경제는 노비제(奴婢制)에 기초하고 있었다. 사족의 물적 토대의 절대다수는 노비의 노동력을 착취한 것이었고, 나머지 일부는 지세(地稅)의 형태로 수취하는 양민의 노동력이었다. 노비에 관계된 제도는 시대에 따라 변화가 없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골격은 1894년 갑오경장 때 신분제가 폐지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몇몇 지식인이 노비제를 천천히 없애자고 제안했지만, 그저 제안에 그쳤을 뿐 노비제는 끝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이 일본에 속수무책으로 밀린 데는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노비제가 아주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인용한 '용재총화'의 이어지는 부분은 이렇다. "중국의 경우 사람이 모두 '국인(國人)'이고 집집마다 모두 정예병이다. 비록 아무리 작은 후미진 고을이라 해도 수만 명의 무리(軍士)를 순식간에 갖출 수 있다."

'국인'이란 말은 노비란 말과 반대가 되는 것이다. 나라에 대해 권리와 의무를 갖는 평민이란 말이다. 남의 소유물이 아닌 사람이라야 군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의 노비들은 어떠했던가?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떠나자 노비들은 노비를 관장하는 관청인 장례원(掌隷院)과 형조에 들어가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 옛날식 표현을 빌리자면 '마소'처럼,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개돼지'처럼 부림을 당했던 노비들은 자신들의 억울함과 불만을 노비 문서를 불태움으로써 나타냈던 것이다.

우리는 임진왜란 때 조선 사람들이 모두 왜군을 몰아내는 데 열중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실상은 뜻밖이다. 1592년 회령(會寧)의 국경인(鞠景仁), 1594년 홍산(鴻山)의 송유진(宋儒眞), 남원의 김희(金希) 고파(高波), 영남의 임걸년(林傑年), 1596년 이몽학(李夢鶴)에 이르기까지 임진왜란 중에도 반란이 줄기차게 일어났다. 왜군의 침략을 받고 있는데도 농민과 노비가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내가 노비라면, 나의 아들 딸과 손자 손녀, 또 그들의 아들딸, 손자와 손녀가 영원히 노비가 되는 나라라면, 그 나라가 지킬 만한 가치가 있을까? 차별받던 노비와 농민에게 임진왜란은 외려 자신을 해방시킬 기회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역사는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다. 또 조선시대를 이렇게 기억하지도 않는다.

조선시대의 신분제가 악명이 높은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세습제이기 때문이다. 한 번 노비가 되면 자자손손 노비다. 1894년 신분제가 폐지되고 양반과 상것과 노비가 없어졌는데, 요즘은 한 번 흙수저로 태어나면 영원한 흙수저란 말이 귀를 울린다. 극소수 금수저가 절대다수의 흙수저를 영원히 지배하는 나라는 지킬 필요가 없는, 가망 없는 나라다. 이 나라는 정녕 노비의 나라에서 흙수저의 나라가 되고 말 것인가. 또 그것이 어김없는 사실이라면, 누가 어떻게 이 새로운 신분제를 타파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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