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가을이다. 가을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높고 청명한 푸른 하늘과 오색 단풍이 곱게 물든 아름다운 숲길 그리고 황금물결이 일렁이는 가을들녘의 고즈넉한 정취다. 길가에 핀 형형색색의 코스모스가 산들산들거리며 빚어내는 풍경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가을의 전령사라고 불리는 코스모스는 신이 세상을 아름답게 해주려고 제일 처음으로 만든 꽃이라고 한다. 연약하고 가냘픈 모양이지만 '조화로운 질서'라는 뜻을 가졌기에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신비로운 천체가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는 우주를 코스모스(cosmos)라고 불렀다. 무질서하고 아름답지 않은 혼돈의 세계인 카오스(chaos)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정의한 것이다.
코스모스가 활짝 핀 올가을 우리 사회에는 오랜 혼돈을 딛고 새로운 질서가 시작됐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이른바 김영란법 시대가 열린 것이다.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법의 취지를 존중하여 합헌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소는 "부패는 법의 지배와 경제 질서를 왜곡해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경제발전을 늦추며 빈부 격차를 확대하는 등 사회 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적시했다.
아직 법 시행 초기라서 다소 혼란스럽지만 음성적으로 이뤄지던 청탁과 접대 관행 등이 사라지면 우리 사회가 예전보다 더 건전하고 투명해질 것이 분명하다. 다만 경제적 타격을 우려하는 시각이 많다. 무엇보다 음식업 유통업 농축수산업 골프업 등에 미칠 부정적 영향이 가시화될 것인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당분간 추이를 지켜봐야겠지만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소비 위축으로 관련 서비스업의 매출과 고용이 감소하고, 특히 영세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등이 피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걱정이 크다.
하지만 이제 활은 시위를 떠났다. 단기적으로 어려움이 있더라도 법이 지향하는 바를 지키며 사회의 건전성과 경제의 효율성을 높여나가야 한다. 하루빨리 아름답고 조화로운 새 질서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더글러스 노스 교수는 경제성장의 근본적인 원천은 '효율적인 제도'라고 주장했다. 나라마다 제도의 발달과정이 달랐고 그러한 제도적 차이로 인해 어떤 나라는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지만 어떤 나라는 부진했다는 것이다.
자주 인용되는 역사적 사례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18세기 후반 서구유럽이 개인의 재산과 자유를 보장해주는 제도를 기반으로 산업혁명을 이룬 반면 유교를 근본이념으로 둔 중국은 당시 세계경제의 중심에 있었는데도 새로운 변화를 유인할 제도를 갖추지 못해 경쟁에서 뒤처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미국과 남미 국가들의 성장 격차다. 경제발전 초기만 해도 비슷한 수준에 있었지만 민주적인 정치제도와 공정한 시장경제 체제를 확립한 미국과 달리 부패한 정치권력과 소수의 재벌이 부를 독식하는 구조에 빠진 남미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결과를 보였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다. 다양한 요인이 있었겠지만 노스 교수가 강조한 바와 같이 경제개발 정책을 뒷받침했던 강력한 제도적 지원이 중요한 원동력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지금은 저성장 시대다. 과거의 패러다임으로는 더는 대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경제는 한 번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면 쉽게 패턴이 바뀌지 않는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을 가진다. 일정한 경로를 밟기 시작하면 근본적인 경제구조의 변화 없이는 그 방향을 획기적으로 전환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지난주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138개국 중 26위를 차지해 3년째 똑같은 순위를 보였다. 2007년에 11위까지 올라간 이후 다시 퇴보한 것인데 더욱 충격적인 결과는 지난 10년간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순위가 내려간 곳은 한국과 태국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경고음이 울린 지 오래다. 주력 산업은 역동성을 잃어버렸고 저출산과 고령화에 따른 인구절벽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20년 넘게 장기불황을 겪고 있는 일본처럼 정말 심각한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 쇠락의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성장경로를 창출할 수 있는 정책 수립과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개혁이 절실한 이유다.
변화는 낡은 고정관념을 버리고 기득권을 내려놓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세계적인 경영 사상가 마셜 골드스미스 박사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심리적 자극을 일컫는 트리거(trigger)는 갑자기, 또 예기치 않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사회의식의 대전환을 가져올 김영란법이 한국의 경제성장을 촉진할 트리거로도 작용하길 기대해 본다.
BNK금융그룹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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