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에 관한 법률'(인문학 진흥법)이 제정 공표되어 지난 8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 법은 2013년 신계륜 전 의원이 발의하고 지난해 말 논의를 거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신 전 의원은 취업을 우선하는 대학과 사회적 분위기에서 고사 위기에 처한 인문학을 되살릴 목적으로 인문학 진흥을 위한 법을 만들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나는 이 법이 대학의 인문학과를 없애는 일을 막고 연구와 인력양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법일 것이라 조심스레 기대했다. 또 대학의 현실과는 달리 인문학 열풍이라 할 만큼 사회는 인문학 소비로 활황을 이루고 있는데, 이 기이한 불균형을 바로잡는 법일 것이라 역시 기대했다. 그런데 법조항과 시행령을 살펴보니 내 기대는 허상에 불과했다.
우선 이 법은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를 진흥하고 사회적으로 확산함으로써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고 나아가 국민의 정서와 지혜를 풍요롭게 하며,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2조에는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이 인간의 존엄을 바탕으로 사회적 문화적 가치와 조화를 이루고 경제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도록 하며, 국민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존중받도록 하고, 인문학이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과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함을 기본이념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를 위해 교육청을 포함한 국가기관과 지자체가 매년 구체적으로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해야 한다고 했다.
기본계획에는 인문학 연구의 다양화와 연구결과의 사회적 확산, 인문교육의 다양화, 다른 학문과의 융·복합, 인문정신문화 향유 활동 지원 및 환경 조성, 전문인력 양성, 관련 자산의 발굴 보존, 인문 콘텐츠 개발지원 등이 나열되어 있다.
세부안을 마련한 기본계획을 어디에서 추진할지가 중요한 문제다. 여러 전담기관이 명시되어 있지만 무엇보다 이 법이 제대로 시행되려면 전문연구자가 있어야 한다. 기본계획에도 보이듯이 인문학 연구인력을 안정적으로 양성하여 이들이 연구에 전념하도록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 물론 지금 원숙한 인문학자가 적지는 않다. 그러다 그들은 언젠가는 사라지기 마련이니, 후학들이 뒤를 이어야 한다.
현실은 어떤가. 인문학 관련 학과는 급속도로 사라지고, 대학원에는 학생이 들어오지 않아 간판을 내려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사실 이 점은 이 법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 사안이다. 따라서 이 법은 무너지고 있는 연구자 양성 시스템과 연구기반을 회복하는 데 주목적을 둬야 한다. 인문학이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과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한다면 더욱 시급한 일이다. 이 일은 교육부와 대학에서 맡아야 할 부분인데 실상은 전혀 다르니, 유심히 지켜볼 일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이 법이 연구 시스템 복원에 집중해야 함에도 여기에서 벗어나 터무니없이 큰 목적을 설정한 점이다. 국민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존중받도록 하는 일은 사상의 자유를 제약하려는 정치세력과 법이 존재하는 한 요원한 일이다.
삶의 질을 개선할 목적은 어떻게 이룰 것인가. 이는 오히려 경제부처에서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할 사안이다. 취직을 못해 연애, 결혼, 출산이 불가능한데 인문학으로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인문학 관련학과를 없애고 있는 것 아닌가. 인간의 존엄성 또한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기본이념이다. 따라서 굳이 이 법이 아니라도 헌법을 잘 준수하고 이에 맞게 정치를 해가면 될 일이다. 무엇보다 정치가가 인간의 존엄성 중시를 정치의 제1 원리로 체득해야 한다. 그런 뒤 각 분야에서 인간존엄을 지키기 위한 세부적인 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가습기 살균제 사고 등 각종 대형사고, 활성단층 위에 원전을 짓도록 법으로 허가한 일 등을 보면 과연 이 나라에 국민의 생명,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법과 정치가 작동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렇듯 인문학진흥법은 그 실효성에 의문만 커진다. 결국 이 법은 대학의 인문학 고사를 막는 법이기보다는 사회의 인문학 열풍에 기름을 붓는 법이 될 공산이 크다. 그간 관공서와 지자체가 인문학 사업을 활발히 벌였으나, 역설적으로 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사고와 인명경시 풍조는 더욱 늘어가고 있다. 심지어 기업에도 CEO인문학이라는 인문학강좌가 성행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재벌일족과 CEO들의 인간 존엄성을 짓밟는 갑질은 끊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 법이 인문학을 진흥시킬 수 있다는 기대는 망상에 가깝다.
경성대 인문문화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