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상설중재재판소(PCA·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는 지난 12일 남중국해 분쟁과 관련한 필리핀 측의 제소에 대해 만장일치로 필리핀 주장의 대부분을 수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이 문제를 둘러싼 관련국들 간의 갈등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특히 상설중재재판소는 그간 중국이 역사적 권원을 이유로 주장하고 있는 구단선(九段線·Nine Dash Line)에 대해 중국이 역사적으로 해당 수역에서 배타적 권리를 행사했던 증거가 없으며, 남중국해 남사군도(南沙群島)에 있는 어떠한 섬도 사람들이 안정적으로 거주하거나 독자적으로 경제활동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섬들은 배타적 경제수역을 갖지 못한다고 판결하였다.
이에 따라 제소 당사자인 필리핀은 물론, 이 수역에서의 항해와 상공 비행의 자유를 주장하며 중국이 주장하는 수역에 정기적으로 군함을 통과시키는 작전을 전개해온 미국에게는 매우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남사군도는 남중국해 남부 해상에 있는 군도로, 일명 스프래틀리 군도(Spratly Islands)라고도 한다. 동쪽에는 필리핀의 팔라완섬과 보르네오, 서쪽에는 베트남과의 사이에 걸쳐 있다.
남중국해는 석유, 천연가스 등 에너지 자원과 어족 자원이 아주 풍부해 경제적 가치가 크며, 인도양과 서태평양을 연결해주는 주요 해상 통로이다. 또 미국 입장에서 남중국해는 거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우월적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해양 요충지이다.
중국에게도 남중국해는 자국의 중요한 에너지 수송로일뿐 아니라 대양 진출을 위한 관문이라는 점에서 그 전략적 가치가 매우 큰 곳이다. 중국은 국민당 정부 시절부터 남중국해의 80%를 차지하는 수역을 대상으로 9개의 점선으로 이어진 구단선을 설정하고 이 수역이 중국의 영해이거나 중국의 배타적 권리가 미친다고 주장해왔다. 이로 인해 중국은 이웃 국가인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과 영유권이나 어업권을 다툼을, 그리고 미국과는 미해군의 활동범위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어왔다.
금번 상설중재재판소의 판결에 대해 중국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남중국해에 존재하는 중국의 영토주권과 해양권익은 중재판결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즉각 언급하는 등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아울러 중국 해군은 이곳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해 강경한 자세를 내외에 과시하고 있다. 반면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이번 중재재판소의 판결은 최종적이고 구속력이 있다고 평가하면서 중국이 이를 받아들이라고 압박하는 한편, 모든 당사자가 도발적 언급이나 행동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였다.
중재재판소의 이번 판결은 중국이 거부하면 이를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남중국해 분쟁과 관련한 첫 번째 국제법적 판결이라는 점에서 중국에게는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필리핀의 신임 대통령이 중국 측에 대화를 제의해 놓고 있으며, 중국은 올 9월 항저우의 G-20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 당분간은 재판 결과를 강하게 비난하는 선에서 대응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국내의 여론을 감안해 남중국해에서 인공섬 건설과 군사시설 공사를 계속 진행할 가능성이 크다. 더 나아가 남사군도에 있는 섬들에 영해 직선기선을 선포해 상당한 수역을 자신의 영해라고 주장하거나 남중국해에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함으로써 미국과 중국 간의 대결이 크게 악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에게도 남중국해 수역은 수출 물동량의 30%와 수입 에너지의 90%가 통과하는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한국은 미중 양측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해 각각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어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하다.
그렇기에 한국 외교부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우리 정부는 상설중재재판소의 판결에 유의하면서 남중국해 분쟁이 평화적이고 창의적인 외교 노력을 통해 해결되기를 기대한다"는 중립적이고 매우 신중한 입장을 내놨다.
현재 한중 간에는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한국 배치 결정과 관련해 마찰이 존재하고 있으며 양국 간에는 해양경계 획정을 위한 회담이 지난해 12월에 재개되었다. 금번 상설중재재판소의 판결은 한국과 일본 양국이 각각 배타적 경계수역의 기점으로 삼고 있는 독도의 해양법상 권리 등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금번 판결에 대해 한국 정부가 신중한 자세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적절한 대응이라고 하겠다.
동서대 석좌교수·중국연구센터 소장